“조용하게 위로를 건네는” 사각형이 가득한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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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조용하게 위로를 건네는” 사각형이 가득한 면 숭고함의 미학…정상화 작가

기사입력2021-07-09 09:59

김태현 미술평론가 (elizabeth0711@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작품 68-1-9’, 1968, 캔버스에 아크릴릭, 115.5×72.3cm. 작가 소장. 사진 갤러리현대.

처음 글씨를 배울 때, 사각형이 그려있는 공책을 펴 든다. 네모난 칸이 가득 쳐 있는 흰 공책에 작은 손으로 연필을 잡고 꼭꼭 힘주어 누르며 글씨를 써 내려간다. 틀린 부분은 지우개로 열심히 지워보지만 꼭꼭 눌러썼기에 그 흔적은 남고, 그 위에 새로 쓴 글씨들로 덮이곤 한다.

◇꾸준한 기록들의 집합=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경험한 초등학교 1학년의 기억은 그렇게 시작된다.

한 글자 한 글자 진지하게 선생님이 불러주신 말들을 글로 바꾸어 나가며 우리는 사회화의 과정을 본격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 사회화 과정은 처음으로 집단생활을 경험하는 8살부터 죽을 때까지, 여러 사람들이 규정한 사회의 법규 혹은 관습적 행위들의 범주 안에서 수행하고 판단하고 평가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삶의 과정에는 명확한 정답이 없다. 무한히 되풀이되는 반복의 시간들이 채워질 뿐이다. 그러나 그 시간들이 모이면 하나의 무엇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줄 수도 혹은 무명으로 잊힐 수도 있다.

마른 물감들이 캔버스 위에 줄지어서 접히고 긁히고 또다시 채워져 있는 정상화의 작품을 보면서 글씨를 처음 배웠을 때 공책 앞에 앉아있던 나의 마음이 생각났다. 그리고 줄지어 걸려있는 그의 캔버스를 보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공책들이 눈앞에 나란히 펼쳐진 느낌이 들곤 했다.

◇엥포르멜에서 단색화까지=1932년 경북 영덕에서 태어난 정상화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젊은 동료 미술가들과 함께 다양한 전시에 참여하며 현대미술을 탐구했다.

그리고 1967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그곳의 활기찬 미술계의 분위기에 매료되기도 했다. 또 기존 작업을 지향하던 엥포르멜 계열의 작품에서 모노크롬, 단색의 캔버스로 작품의 변화를 모색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이 발병했다는 소식과 함께 귀국했고, 프랑스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에서 그의 작품을 이어갔다. 일본에서 그는 구타이 미술가들과 어울리며 미술 활동을 이어갔고, 도모다츠 화랑에서 그의 그림을 지속적으로 판매해 주었기에 안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인의 작고 후 다시 프랑스로 이주해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작품 G-3’, 1972, 캔버스에 유채, 190×13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 과정에서 고령토를 캔버스 천에 바르고 접고 긁어내고, 떼어내고 다시 칠하는 자신만의 기법을 완성했다. 이렇게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나 10번 이상 고령토가 접히고 나뉘며 생기는 균열과 그 위에 덧입혀지는 물감은 격자무늬를 형성하며 같지만 또 다름을 형성하는 조화를 이루었다. 혹자는 이러한 그의 작업방식을 보며 매일 밭을 가는 농부와 같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색을 담아내다=프랑스와 일본을 거치며 정상화는 다양한 미술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캔버스에 집중해 작업을 했는데, 그는 캔버스의 평면을 단순하게 보지 않았다. 접고 또 긁어낸 물감의 곡면과 빛이 마주하였을 때 달라지는 색상들을 유심히 관찰했고, 작품이 걸리는 장소마다 달라지는 빛의 색상에 주목했다.

그의 그림에 새겨진 한 칸의 네모는 단순한 사각이 아닌, 하나하나의 창문이 되어 사각 너머의 세계를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가 만들어낸 풍경은 시시각각, 매일매일의 다른 빛을 담아내는 투명한 그릇과 같다.

또 흰색을 가장 많이 사용했는데 평면 위에 층층이 쌓이며 생성되는 구조를 가장 잘 드러내 줄 수 있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미술가의 눈으로 바라본 흰색은 단지 흰색으로 정의될 수 있는 색감이 아니라 화면에서 모든 색을 표현할 수 있는 색상이었던 것이다.

◇일상에서 발견한 숭고미=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정상화의 회고전이 진행 중이다. 그의 작품을 연대기별로 한자리에서 검토하며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숭고함이었다. 그 숭고함의 근원은 작품의 크기나, 혹은 대단한 손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닌 90세의 노화가가 얼마나 꾸준히 재료와 평면성을 탐구해 왔는지, 그 일관된 끈기와 노력이 엿보이는 것에서 오는 아름다움이었다.

그 과정에서 꾀를 부리지도 않았고, 얕은수를 노리지도 않았다. 그저 성실한 자세로 작품에 임한 미술가의 정신은 그가 만들어낸, 직조하는 사각에 모두 담겨 있었다. 이러한 태도를 기반으로 하기에 그가 만들어낸 사각형이 가득한 면은,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는 이들에게 잘하고 있다고 조용히 위로를 건네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정상화는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기획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대단한 미술가로 기록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그냥 그런 미술가가 있었다고 기억되고 싶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러나 그 말들은 역설적으로 다가와 그의 존재감이, 그의 작품세계가 지니고 있는 성실함의 가치가 얼마나 고귀한지 되새겨 준다. 동시에 그가 한국미술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또 단색화 작가들 중 그의 미술작품이 지니고 있는 가치가 얼마나 큰 지를 새삼 느끼게 해 준다. (중기이코노미 객원=김태현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