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해진 작업복을 세탁소에 수선 맡기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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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불편해진 작업복을 세탁소에 수선 맡기던 날 Life is pain.ting #52. 이사…익숙해져 가는 동네

기사입력2022-04-07 09:09

김윤아 작가 (bombbi0401@naver.com) ㅣ다른기사보기

새로 얻은 작업실은 큰 미술관을 근방에 두고 있는 작은 동네다. 큰 길에서 작업실에 닿으려면, 큰 길에서 이어지는 첫 번째 골목에서 대략 여섯 번 정도의 골목을 더 접어들어야 한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골목골목의 풍경을 특정 짓는 어떤 모습들을 몇 달 내내 꾸준히 목도하게 되면서, 처음엔 골목 하나만 잘못 접어들어도 방향 감각을 잃어 멘붕이 오던 시기가 지나 머릿속에 이 작은 동네의 지도가 형성이 됐다.

이것은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좌, 우만을 가늠하며 찾아가는 일회용 방식과는 달랐다. 처음 내 머릿속에 각인된 기억은 역시 편의점이다. 큰 길에서 한 번 접어들어 다음 교차로가 나오는 지점에 있다. 한 겨울 작업실 공사를 시작하면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거나, 요깃거리를 사러 페인트나 시멘트가 더덕더덕 묻은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들락거린 곳. 철물점에 페인트 롤러를 사러 나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을 때가 두 번째였다.

“이사 오신 거죠? 커피 아메리카노 따뜻한 거 맞죠, 이번엔 그냥 드세요.” 두툼한 체격에 마스크 위로 보이는 두 눈이 웃고 있었다. 아마 꽤나 험하게 입어온 작업복 차림이 인상 깊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후로 나는 외부 일을 보고 들어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를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 곳을 간다.

그 편의점을 지나 다음 교차로에는 딱 봐도 반세기는 운영해왔을 것 같은 외형의 세탁소가 나온다. 그 세탁소 앞에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외형에,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은 채 늘 정말이지 매일매일(말 그대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 앞에 서성이고 있는 남자가 있다. 주로 연베이지 점퍼에 짙은 회색 솜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그를 감싸고 있는 채도는 오랫동안 빈 집에 들어섰을 때 느껴지는 뿌연 먼지가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는 장애가 있었는데 두 다리를 곧게 펴지도 굽히지도 못하는 구부정한 모습으로 세탁소 주변만을 천천히 배회하면서 일종의 재활치료를 하는 것 같았다. 반 백발의 세탁소 사장님이 가끔 나와 그를 확인하고 점퍼를 다시 채워주거나 하는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만, 그 집 아들인 듯 했다.

대여섯 평 되어 보이는 코너의 세탁소집 전면은 유리로 되어 있는데 ‘세탁, 수선’ 등등의 시트지를 붙여 놓은 걸 제외하고 나면 일반적인 가정집 방 창문 크기 정도로만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 네모 안에는 그야말로 그림처럼 세탁소 사장님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스팀이 하얗게 뿜어대는 다리미를 든 마른 어깨는 분명히 앙상했지만, 동시에 잘 만든 캔버스 틀처럼 튼튼해 보였다. 언젠가 수선할 일이 생긴다면(사실, 일부로 만들어서라도) 들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아직까지 그럴 기회를 갖지 못한 집이다.

여전히 그 곳을 지날 때마다 그 생각을 한다. 그 곳을 지나면 이 골목의 대장격인 만두 할머니네가 나온다. 간판이 없어서 나는 그냥 만두 할머니네라고 부른다. 매섭게 추운 겨울 한복판 내부공사가 들어가면서 음식을 해먹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매번 시켜먹는 것도 부담될 무렵 임시용 가스버너로 라면이나 끓여먹다가 들른 곳이다. 간판도 없이 외부에 ‘만두’ 라고 덜렁 하나 쓰여 있는데 문 밖으로 평상 하나 나와 있고, 그 위에는 주방에서나 볼 만한 망이나, 조리용 도구가 가끔 나와 있었기 때문에 장사를 하는 곳인지 불분명했으나 확인할 겸 미닫이문을 열어보니 허리가 완전히 굽어 허리보다 머리가 더 아래쪽에 위치한 할머니가 고개를 든다. 나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자니 잠시나마 내가 거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만두 팔아요?” 반사적으로 나온 질문이었지만, 이미 가게 내부에 있는 각종 오래된 식탁 위에는 잘 나열된 만두들이 포장을 기다리며 빽빽하게 줄 서 있었고, 만두소가 커다란 양동이 몇 개에 담겨 부지런히 만두피 안으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할머니는 혹시 이 앞에 이사 온 처자냐고 묻는다. “맞아요”라고 하자, 할머니는 저 집 살던 노인네들이랑 거의 40년을 이 동네에서 함께 살았다며 반가워했다. 매운 만두랑 덜 매운 만두 두 가지 종류 중에 덜 매운 만두를 달라고 하자, 할머니는 커다란 만두 몇 알을 한 움큼 더 넣어주시면서 계산을 치렀다. 작업장으로 가지고 와 맛 본 만두는 정말이지 엄마가 명절 때 끓여주던 바로 그 맛이었다. 그 후로 나는 마트에서 사먹던 냉동만두를 끊고 할머니네 만두만 먹는다. 가성비를 따져도 더 나은 양이었다.

<사진제공=김윤아 작가>

이렇게 나는 이 동네에 익숙해져 갔다. 공사는 추운 겨울 내내 이어졌고, 중간 중간 작업장 구석에 난로를 피워놓고 쪽잠을 자고 식사를 해먹었다. 더 이상 페인트 묻은 작업복을 입고 나가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졌고, 대신 인사하고 지나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 동네 사람들은 별 다를 것 없이 이어지는 일상의 안부를 소소하게 묻고, 나 역시 잠시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들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코로나 여파로 취소된 몇몇 해외 레지던시나 각종 스케줄에 이어서 2년을 약속받고 들어갔던 사설 레지던시마저 엎어지면서 개인적으로는 일종의 그로기 상태에 접어들었었다. 사설 레지던시는 운영자들이 기업의 눈치를 보느라 간당간당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그 긴장감은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야기시키기도 했다.

작업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동안 이어지던 작가로서의 불안한 삶에 대한 피로가 한꺼번에 고개를 들면서 미술계 소식이나 공모소식은 쳐다보지도 않았고, 관심 자체도 사라졌었다. 이상한 패배감마저 감돌았고, 그건 결코 좋은 방향으로 하루를 인도하지 않았다.

그 사이 내가 한 일이라고는 은행을 돌면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알맞은 작업장을 구하고 공사를 진행하면서, 오로지 물리적인 움직임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일이다. 옥상방수를 위해서 유튜브를 찾아보고 재료를 사러 가고, 오래된 몰딩을 철거하고 주거용 형태의 집을 작업실로 바꾸기 위해 천정을 뜯어냈고, 40년이 넘은 주택의 벽지를 뜯어내며 무려 8장의 벽지가 쌓여 있다는 사실에 까무러친 일이 좀 있었고, 철거 중에 쏟아진 각종 벌레의 알들을 치우고 구석구석 소독하는 일들을 반복했다.

추운 겨울이 지나면서 실내에서 기를만한 몇 개의 식물들을 사 놓을 때 즈음 작업실 공사가 거의 마무리가 됐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함 따위의 것들은 보통 물리적 노동이 제법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터득해 왔던 나는 작업실이 마무리가 되어가면서 꽤 가벼워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작업실 공사가 끝나면서 버리기엔 아깝고, 이대로 사용하자니 불편해진 작업복들이 여러 개 쏟아져 나왔다. 드디어 벼르던 세탁소에 수선을 맡길 수 있다. 커다란 에코백에 작업복 두 개를 쑤셔 넣고 작업장을 나왔다.

세탁소에 수선을 맡기고, 편의점에 들러 커피를 한잔 손에 들고 홀짝거리면서 돌아와 냉장고에 몇 알 남은 만두를 끓여 먹었던 날씨가 유난히 좋았던 오후, 오랜만에 공모창을 띄웠다. 한 번 깊은 숨을 참아야 했지만 몇 년만에 서류를 작성하면서 두통약을 찾지 않은 적은 처음이다. 작업복 수선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 (중기이코노미 객원=김윤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