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범람한 한강…잠긴 여름을 건져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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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유난히 범람한 한강…잠긴 여름을 건져 올리다 손길들…문이삭 작가의 조약돌과 이민지 작가의 사진

기사입력2023-01-06 00:00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지난해 11월, 그 해 입주한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에서 오픈스튜디오를 진행했습니다. 오픈스튜디오는 작가의 작업공간을 지원·제공하는 레지던시(residency)에서 입주자의 작업공간을 한시적으로 개방하는 행사입니다.

한 해를 꼬박 이곳에서 지냈지만, 작가들이 있는 방의 문을 두드리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가을이 되어 비로소 이곳에서 함께 지낸 작가들의 작업실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좋은 작업을 하는 작가들의 작업실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설렜고, 용기 내어 쭈뼛대며 인사를 건넸습니다. 한편으로 한 해 동안 작업공간을 지원받았음을 감사히 여기며, 방문하신 분들께 그동안 제가 쌓아온 작업을 소개드려야 하기에 약간의 부담과 책임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난지창작스튜디오는 한강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도심에 있지만, 어찌 보면 외딴곳이자 고요한 곳입니다. 작업실에 오갈 때는 많은 자연물과 만날 수 있습니다. 스튜디오 입구에서 걸어 나오면 캄캄한 길목을 밝히는 가로등이 있는데, 가로등 불빛이 무성한 나뭇잎을 통과해 빛 그늘을 만듭니다. 이상하게 이 나무 주위에는 늘 바람이 많이 불었고,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 소리를 들을 때 난지는 쓸쓸하기보다는 생명이 가득한 곳이라 느껴집니다. 저는 이 길목을 무척 좋아합니다. 지난여름에는 전시 준비에 바빠 늦은 시간에 귀가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왔고, 강변의 풍경은 날씨에 따라 선명해 보이기도, 흐려 보이기도 했습니다.

문이삭 작가, ‘조약돌’, 2022, 범람한 한강 흙 소성, 한 손 크기, ‘RtoR Express(알투알 익스프레스)’ 전경 ©김익현,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어느 날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한강변에 자리한 정류장에 버스가 정차하지 않았습니다. 비가 아주 많이 온 다음 날이었는데, 순식간에 강이 불어나 안전상의 이유로 버스가 정류장을 우회했기 때문입니다. 소란스러운 며칠이었습니다. 그다음 며칠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고요해졌습니다. 마른 흙은 진흙이 되어 산책로에 어지러운 토사로 남았고, 범람한 강물 때문에 허리까지 잠겨있었던 나무들은 물을 털고 제 몸을 다시 드러냈습니다.

이 시기의 기억이 유난히 선명합니다. 그러나 계절을 지나며 선명했던 기억이 조금씩 멀어졌습니다. 문이 열린 스튜디오에서 문이삭 작가가 만든 조약돌과 이민지 작가가 찍은 사진들을 보았고, 비가 아주 많이 왔던 지난여름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문이삭 작가는 손에 꼭 쥘 수 있는 크기의 조약돌을 만들었습니다. 작가는 지난여름 한강에서 범람한 진흙을 채집했고, 이 흙을 동그란 모양으로 뭉쳐 1260도로 소성(燒成)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작은 돌멩이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이 돌은 ‘RtoR Express(알투알 익스프레스)’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RtoR Express’는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와 고양레지던시를 오가는 셔틀버스 안에서 입주작가 15인의 영상작품과 오브제를 감상할 수 있도록 기획된 프로그램입니다. 작가는 조약돌과 함께 “목적지에 도착하실 때까지 주머니에 넣으시고, 생각이 날 때마다 만져보세요”라는 문장이 쓰인 자그마한 편지를 승객들에게 나누어줬습니다.

작업실 책상으로 돌아와 저는 이 돌을 한 손에 꼭 쥐어보았습니다. 유난히 많이 범람한 한강에서 진흙을 퍼오고 모양을 만든 작가의 손길을 떠올렸습니다. 작가는 어떤 마음으로 작업대로 흙을 옮기고, 이 돌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을까요?

작가에게 직접 질문해볼 수 없었지만, 여름과 가을을 떠나보내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우리가 지난여름의 일을 너무 빨리 잊어버린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많은 것들이 빗물에 쓸려가고 잠겨버린 천재지변, 자연의 변덕스러움 앞에서 무력함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 그 며칠간의 일들을요. 여름 이후에도 우리에게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까맣게 잊어버린 것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문이삭 작가의 편지에 적혀있던 마지막 말을 다시금 읽어봅니다. “생각나실 때마다 한 번씩 쓰다듬어주셔도 좋겠습니다. 물론, 어떻게 사용하시던지 당신의 자유입니다.” 아마 저는 이 돌을 아주 오랫동안 간직하고 가끔 생각날 때마다 쓰다듬을 것 같습니다.

2022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오픈스튜디오 ‘투어리즘’ 전경. ©김익현,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

3일간 진행된 오픈스튜디오에는 많은 방문객이 오갔습니다. 행사 이후 저는 옆방을 쓰고 있는 이민지 작가가 참여한 전시 ‘우연을 기대(2022.10.18~11.19, d/p, 기획:조은비)’를 보러 갔습니다. 문이 열린 작가의 방에서 군더더기 없이 말끔히 정리된 사진들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또한, 작가는 나뭇잎과 곤충의 날개 같이 작고 연약한 것들을 조심히 옮겨 작업대에 모아두었습니다. 컴퓨터 앞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저와 다르게, 이민지 작가는 카메라와 함께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모아내고 기록하며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작가가 한 해 동안 카메라를 통해 어루만진 잔상을 잠시 헤아려 봅니다.

‘우연을 기대’가 열린 d/p는 낙원상가 4층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악기들이 이리저리 구불구불 모습을 뽐내고 늘어서 있는 아케이드를 지나쳐야 도착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전시는 모든 것을 복구하거나 되살릴 수 있다고 믿는 세계를 돌파하고, 함께 살아갈 개인으로부터 발생할 우연을 마주하는 기획자의 고민을 담았다고 합니다. 무심히 툭 접혔다 펴진 종이에 쓰여 있을 것 같은 전시의 제목을 생각하며, 영원히 회복될 수 없다는 것에 마냥 슬퍼하지 않고, 새로운 시간을 마주하려는 용감한 마음을 떠올렸습니다.

입구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던 것은 회색빛의 바닥과 흰색의 벽, 그리고 칠하지 않은 나무 벽 구조물이 시원하게 이웃한 모습이었습니다. 시린 세노, 신민, 이민지, 장서영, 노예주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작품들이 만들어낸 장면을 골똘히 생각하며 꽤 오랜 시간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전시장 한쪽에 이민지 작가의 연작 사진 ‘그라운딩’ 다섯 점이 함께 걸려있었습니다. 사진들에서 경계를 드러내지만 얽히고 이어진 것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펼쳐진 채로 퉁퉁 불어 접힌 책, 등을 맞대고 어깨를 포개며 손을 마주 잡은 두 사람, 바닥에 목을 대고 누운 사람의 몸 그리고 침수된 곳에서 드러난 얽힌 나무뿌리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사진들의 모음이 어떤 이야기를 건네고 있을까 질문하며 전시장을 빙글빙글 몇 바퀴 돌았습니다.

작가의 사진 속 어지럽게 연결된 뿌리들은 땅의 힘이 완연히 드러난 장면의 기록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구 위에 서 있는 모든 것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땅은 깊이 얽힌 여러 힘들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눈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운 힘들입니다. 비가 아주 많이 오고 난 뒤에서야 너무 당연한 이 힘들을 살펴보게 된 것은 아닌지 질문해 봅니다. 이것은 비단 나무와 땅 그리고 뿌리의 이야기에만 해당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드러나지 않은 것을 움켜쥐어 찰나의 시간으로 고정하는 사진가의 손을 떠올립니다. 눈을 통해 바라보고, 셔터를 누르고, 사진을 고르고, 전시장에 사진을 놓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봅니다.

두 작가의 작품으로부터 멀지 않은 지난날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퍼내고, 감싸고, 탐험하며 과거를 다시 열어젖힐 수 있게 허락하는 손길들. 이 손길들은 과거를 그저 먼 곳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되짚는 손길입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잠긴 여름을 다시금 건져 올려봅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