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의 삶도 얼룩처럼 납작해질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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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남은 자의 삶도 얼룩처럼 납작해질 수 있음을 폐허에 대한 사랑…‘폐허가 된 루브르 그랑 갤러리의 전경’과 마주치며

기사입력2023-05-08 13:26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우연히 자료 검색을 하다가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 1733~1808)가 1796년에 그린 ‘폐허가 된 루브르 그랑 갤러리의 전경(Vue de la Grande Galerie du Louvre en ruine)’이라는 그림을 마주쳤다.

위베르 로베르 ‘폐허가 된 루브르 그랑 갤러리의 전경’

로베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대규모 전시실인 그랑 팔레가 무너진 광경을 상상해 그렸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오가는 아름다운 루브르를 떠올려보니, 작가가 먼 미래의 시간을 앞당겨 보여주는 것처럼 느낀다. 작품을 통해 로베르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장소가 거스를 수 없는 힘에 의해 사라질 수 있음을 알려주려 했을까?

폐허는 원래 건물이나 성 등 살아있는 것들을 위해 존재한 것들이 파괴되어 남은 자리이자 흔적이며, 로베르의 그림뿐 아니라 다양한 예술작품에서 기록되거나 재현되어 왔다. 예술가들은 왜 사라진 것들의 자리를 확인하고, 기록하고, 재현하기 위해 그들의 시간을 썼을까? 무엇인가가 없어진 후에 남은 흔적을 자꾸 살펴보는 일은 가학적으로까지 느껴진다. 왜 이 고통을 감당하거나 무릅쓰는가. 질문을 하다 보니 폐허에 대한 관심이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했다고 느낀다. 여기에 있었다 없어지며 빛을 잃어버린 것, 현재의 시간과 공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을 되새기는 사랑. 내가 안전하게 살 수 있고,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과의 정서적 기반이 파괴되거나 사라진 모든 상황까지를 폐허라 말해보고 싶다.

몇 해 전, 내 삶을 꾸리던 일부가 사라진 적이 있었다. 생활은 좀처럼 그전과 같은 모습으로 빠르게 돌아오지 않았고 할 수 있는 일이 좀처럼 없었다. 글을 잘 읽을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나 그 시기가 점점 희미해지기만을 바랐다. 나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커다란 슬픔에 빠졌다. 그때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일은 닿을 수 없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거나 예전에 찍었던 사진들을 컴퓨터로 정리하는 일, 그리고 운동화를 신고 어딘가에 방문하는 일이었다. 이후 시간이 조금 지난 뒤 나는 이 편지들과 자료를 엮어 영상 작품 시리즈를 만들게 되었다.

박선호, ‘얼룩-2:부드러움과 단단함(Stain-2:Hard and soft)’, 2019, 싱글 채널 비디오, 08분03초. ‘2019 Doosan Art LAB:Part II’ 상영 전경. <사진 제공=두산갤러리>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인 ‘얼룩-2:부드러움과 단단함(Stain-2:Hard and soft)’을 편집하며, 나는 생생하게 살아있던 부드러운 것이 사라진 다음 남아있는 흔적을 보러 다녔다. 과거의 풍경이 담긴 사진엽서를 파는 우표상에서 사진엽서를 만지작거렸고, 동물의 뼈, 광물화된 나무와 식물 화석이 보관된 박물관에 갔다. 또한, 더 이상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나라를 먼 거리에서 희미하게나마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를 찾았다. 작은 비디오카메라로 이 여정을 기록했다. 또렷한 목적이나 이유는 없었다. 추측건대 당시의 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어 부드럽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딱딱하거나 납작해진 모습을 확인해보려 한 것 같다. 이는 지금 내 앞에 없지만 그때 거기 있었던, 사라진 것들이 온전하게 복구될 수 없음을 확인하는 절차였다.

로베르의 그림 속 폐허로부터 얼룩처럼 흔적만 남은 것을 바라본 과거의 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이상한 사랑은 삶의 상흔을 직면하고, 각자의 이유로 폐허를 가지게 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할 수 있던 유일한 일이었다. 또한, 사라진 것들 사이에서 남은 누군가의 삶은 계속되며, 그 생 역시 언젠가 사라져 얼룩처럼 납작해질 수 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