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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예술을 읽다

전시가 끝난 후 들어 선 텅 빈 공간과 하얀 캔버스

Life is pain.ting…레지던시 풍경 #11. 텅 빈 

기사입력2018-11-22 10:13

전시 철수를 하기 위해 들려, 무심코 집어 든 방명록에는 전시기간 동안 다녀간 분들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져 있었다. 이름 하나 하나를 그토록 정성스럽게 읽어 내려간 적이 있었던가. 아마 작가들이라면 개인전 방명록에 적혀진 이름들의 무게가 무거운 추처럼 투욱- 투욱, 가슴에 내려앉는 기분을 알 것이다.

 

3주 남짓 이어진 전시장에 들어서서 작품에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맞춰진 조도가 낮은 조명 스위치를 끄고, 작품 포장을 위해 실내등 스위치를 올렸다. 하얀 LED 조명이 들어오자 전시장 가운데를 지나치리만큼 훤하게 비췄다. 자칫 수술실에 잘못 들어선 것 같은 기분에 두 눈이 조도에 맞게 익을 때까지 눈꺼풀을 여러 번 꿈뻑거리고 서 있었어야만 했다.

 

작품 포장재와 각종 박스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하나씩 작품을 다시 포장하기 시작했다. 운송차량이 충격 방지장치가 되어 있는 경우라면 모를까(운송비용이 훨씬 비싸다), 차라리 포장을 꼼꼼히 하고 일반 운송트럭으로 작품을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깨지기 쉬운 작업은 에어포장재로 두 번 세 번 말아서 포장 후, 하드박스 안에 넣고 회화작업의 경우엔 네 모퉁이를 가장 신경써서 두툼하게 포장한다.

 

한가득 용달 차량에 작품들을 실어 보낸 후 텅 빈 전시장 공간에 들어섰다. 전시 후 텅 빈 공간에 들어서서 곧게 뻗어나간 모서리가 서로 맞닿은 벽면들을 마주하는 게 처음인 것도 아니지만, 이럴 때면 매번 그 공간을 한참을 서성이게 된다. 기간 동안 다녀간 사람들의 발자국들을 그려보기도 하고 작품들이 채우고 있을 때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작업의 위치들을 되짚어 다시 그려보기도 하다, 습관처럼 고개를 들어 조명 레일에 달린 전구의 눈알을 괜히 바라보기도 했다.

 

노르스름했다가 회색으로 꺼지는 자연광이 조금 스며들었다 밀물처럼 빠지는 점 하나 눈에 띄지 않는 텅 빈 공간은 사실상 가장 완벽한 공간이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과 치고 올라오는 감정들을 더 이상 접을 수 없는 종이마냥 접고 접어 내동냉이치고 일단 이 길었던 회피로부터 도망치고자 고무 망치를 집어 들었다. 캔버스 틀을 짜는 일이 이토록 비장할 일이 아닌 그저 일상임에도 틀 위로 툭툭 고무망치를 내리치며 피식 웃음도 새어 나왔다.<사진제공=김윤아 작가>
그러고 보면 그림을 그리기 위해 탄탄하고 하얗게 잘 짜여진 흰 캔버스 앞에서도 그런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이 무결점의 상태를 바라보며 왜 이 곳을 이토록 결점 투성이의 상태로만들어 방황하는 짓들을 반복하고 있느냐는 자책과 극복의 굴레. 무한 긍정과 가능성의 상태를 왜 그대로 두지 못하고 기어코 점 하나라도 찍어 놓고 마는 것일까.

 

작업의 성향마다 접근 방법이 다르지만 수학적 접근 방식이든, 본능에 충실한 방식이든 화면을 찢든, 던지든, 구멍을 내든, 바늘을 이용해 수를 놓든, 완벽한 균형과 색채의 조화를 추구하던, 완벽한 추()의 미학을 추구 하든-이 완벽한 상태의 화면을 계속해서 망치고 망쳐 들어가는 시작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루소(Rousseau)가 말한 있는 그대로의 미를 추구하는 자연주의와, 루소의 자연주의 문화에서 자랐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서는 인공적인 조화가 필요하다는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사유의 차이에는 의견들이 분분하다.

 

그럼에도 그 텅 빈공간, 혹은 캔버스의 태도가 흠 잡을 곳 없는 거만함으로 다가올 때면 순간 움츠려 들 때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이 쏟아진 물잔처럼 테이블을 흥건히 적시고 있을 무렵내 옆에 공간 대표가 커피를 한잔 들고 와 건네고 서서 함께 텅 빈 공간을 바라보다, 이내 빗자루를 하나 들고 들어와 괜히 바닥을 쓸기 시작하며 이런 저런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작가들은 모르겠지만 우리처럼 공간 운영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건 순환입니다. 끊임없이 전시가 이뤄지고 다음 전시가 진행되고 하니까. 일 년 동안 전시를 진행하면서 어느 것 하나에 크게 마음 쓰려고 하지 않는 게 있어요. 왜냐면 그렇게 하면 다음 전시가 너무 두려워지더라구요. 그냥 일 년 정도 순환하다 보면 시간이 지날수록 잔향이 길게 오는 전시들이 있어요. 그게 중요하더라구요.”

 

늦은 밤 컴컴해진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유난히 빠르게 냉기가 스며드는 산자락 밑 이 공간에 초저녁부터 웅크리고 앉아 있었을, 손으로 건드리면 만져질 수도 있을 만큼 단단한 한기가 나를 맞이했다. 서둘러 뜨거운 커피를 내리고 공기를 조금 흐트려 놓기 위해 작업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두어 번쯤 가로지르면서 괜히 분주했다. 지난 달 주문해 놓고 쳐다보는 것만으로 이상하게 숨막히던 캔버스 틀 묶음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Say’ 작품은 약 1년 반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물론 그 사이 전시에 들어가는 설치 작품 및 다른 형식의 작업들이 있었지만, 작품 사이즈를 떠나 이토록 마라톤 대화를 이어가며 진행하게 되는 작업도 드물었다. 그 후유증 때문인지 이유는 아직 알 수는 없으나(모른데도 상관없다) 새로운 작업으로 쉬이 에너지가 이동하지 않았다. 외려 사력을 다해 도망 다니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이런 저런 생각과 치고 올라오는 감정들을 더 이상 접을 수 없는 종이마냥 접고 접어 내동냉이치고 일단 이 길었던 회피로부터 도망치고자 고무 망치를 집어 들었다. 캔버스 틀을 짜는 일이 이토록 비장할 일이 아닌 그저 일상임에도 틀 위로 툭툭 고무망치를 내리치며 피식 웃음도 새어 나왔다.

 

작업실의 한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천까지 하얗게 씌워 캔버스 100호 짜리 두 개를 완성하고 벽에 기대에 세워 놓았다. 손바닥도 욱신거리고 등 쪽으로는 땀이 흘렀다 마르는 과정은 조금 따끔거리기도 했다. 나란히 서 있는 티 없이 말간 하얀 얼굴은 여전히 가장 완벽한 상태라는 듯 여기서 더 이상 니가 뭘 할건데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 나는 그 말간 얼굴을 쓰다듬던, 따귀를 한 대 치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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