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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확행(小確幸)’이 존중받는 사회가 돼야

작은 것에 행복을 누릴 수 없다면, 크고 거창한 것 역시 행복 아닐 수도 

기사입력2018-12-10 11:38
김준모 객원 기자 (gubtree@hanmail.net) 다른기사보기

 ‘소확행(小確幸)’, 언제부터인가 생소한 한자단어 하나가 우리의 삶에 들어와 익숙해졌습니다. 출판된지 이십년도 넘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집에서 나온 단어가 소환돼 널리 퍼진 이유는, 지금 우리의 삶이 ‘작지만 확실한 행복’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우리는 그동안 크고 거창한 무언가를 위해 소소해 보이는 것들을 미루는 삶을 당연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크고 거창한 무언가는 지금이 아닌 미래,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대부분 작고 볼품없어 보이는 것들이 놓여있지요. 작고 볼품없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크고 거창한 무언가를 위해 노력하는 태도를 우리는 현명하다고 칭송했었겠지요.

 

어딘가, 언젠가에 있을 거창한게 중요하다고 해서 지금 여기 있는 작은 것이 하찮을 필요는 없습니다.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한 거창한 것은 그것대로, 지금 여기 놓인 작은 것은 또 그것대로 중요합니다. 그것이 ‘행복’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행복은 저축했다가 나중에 인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많이 쓴다고 닳는 것도 아니니까요.

 

“막 구운 따끈한 빵을 손으로 뜯어 먹는 것, 오후의 햇빛이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

 

무라카미 하루키는 수필에서 소확행을 이렇게 묘사했다죠. 사실 저는 별로 공감가지 않습니다. 저는 빵을 좋아하지 않고, 브람스의 실내악이 뭔지도 모르며, 정리된 속옷이나 새로 산 셔츠에서도 행복을 느낀 적이 없으니까요. 저는 등산을 하고 내려와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를 좋아합니다. 늦잠에서 깬 일요일 낮에 ‘전국노래자랑’에서 듣는 송해 선생님의 재담을 좋아하고, 어린 딸의 입가에 묻은 짜장 양념을 보며 행복해지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하게 느끼는 순간이 다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그때그때 달라지기도 하지요. 식구들과 함께하는 저녁식탁이 행복일 때도 있지만, 텅 빈 집에서 필사하며 읽는 시 한 편에 가슴 가득 행복이 차오르기도 하지요. 때론 왁자지껄한 식구들의 대화가 짜증나기도 하고, 퇴근하고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으면 와락 외로움이 엄습할 때도 있습니다.

 

‘소확행’이 비록 작아도 확실한 행복일 수 있으려면,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상태도 알아야 하겠지요.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과 스스로에 대한 성찰이 깊을수록 확실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겠죠. ‘소확행’은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 관심과 애정이 있어야만 누릴 수 있는, 자기 자신의 작은 부분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특권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여기서 작은 행복을 확실히 누릴 수 없으면 나중에 올 거창한 것이 행복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김치찌개를 끓여서 둘러앉은 저녁식탁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면 주말의 외식으로도 행복해질 수 없고, 적금을 모아 다녀온 해외여행마저도 눈호강만 하고 오는 건조한 이벤트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큰 행복을 위해 작은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오히려 큰 행복조차 느낄 수 없게 스스로를 길들이는 어리석은 선택인지도 모릅니다.

 

크고 거창한 것을 위해 당장의 작은 행복을 포기하게 된 것은 사회적 학습의 결과입니다. 국가를 위해 사회구성원들이 희생하고, 회사를 위해 노동자가 희생하고, 가족을 위해 가족 개개인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배운 결과입니다. 그리고 선진국이 되면, 경제가 좋아지면,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제대로 성공하면, 뭔가 거창한 일이 일어나면 모두 행복하게 될 거라는 환상에 길들여진 결과입니다.

 

‘소확행’은 행복을 포기하게 하는 사회적 강요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하게 합니다. ‘소확행’은 개인의 행복을 강조한 단어이지만 ‘소학행’을 통해 행복한 사회를 위한 조건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족 개개인이 불행한데 행복한 가족은 있을 수 없고, 노동자를 희생시키는 행복한 회사도 있을 수 없으며, 사회구성원이 불행한 행복한 국가 역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는게 크고 거창한 것을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것에서도 행복을 놓치지 않는 능력은 크고 거창한 것을 행복으로 맞을 수 있는 토대가 됩니다. ‘소확행’은 크고 본질적인 변화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크고 본질적인 변화의 방향을 행복으로 이끄는 역할을 합니다.

 

자동차를 수출하기 위해 농산물을 수입할 수밖에 없고, 산업이 발전할수록 실업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자동차를 수출하기 위해 농민들을 고향에서 쫓아내고, 산업이 발전하는 대신 빈민들이 거리를 떠도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수출을 늘리고 산업을 발전시킨 이유가 사회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라면, 그 풍요는 농민과 실업자가 함께 누려야할 풍요입니다.

 

미래를 위해, 거창한 무언가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이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거나 일부의 희생을 조건으로 하는 선택이라면, 그 선택으로 변화될 미래는 불행할 것입니다. 미래의 커다란 행복을 위해서라도 현재 누릴 수 있는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꽉 잡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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