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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 준 칼…정부, 감당할 수 없으면 내려놔라

국민연금, 재벌개혁을 위해 주주권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기사입력2020-02-08 00:00
중기이코노미 기자 (junggi@junggi.co.kr) 다른기사보기

대한항공이 6일 이사회를 열어 이사회의 독립성 강화를 위해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를 전원 사외이사로 구성하기로 했다. 이와함께 사외이사만이 참여하는 거버넌스위원회를 신설하는 방안도 함께 의결했다. 거버넌스위원회는 주주가치 및 주주권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경영안건을 사전 심의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엄마 아들에, 딸 둘까지 가세해 벌이는 골육상쟁 와중에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이 낸 쇄신안이다.

 

거수기에 불과한 사외이사진이다. 이들을 사외인사가 추천을 하는 것과 조원태 회장이 지명하는 것과의 차이가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대한항공의 주주가치 및 주주권익을 결정적으로 훼손한 당사자는 조 회장 일가다. 총수일가가 갑질에 앞서 거버넌스위원회의 허락을 받겠다는 용도 외,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옥상옥이다. 어차피 총수일가의 독단적 전횡을 제지할 견제장치를 마련할 생각이, 조 회장에게 티끌만큼도 없어서 하는 말이다.

 

대한항공만의 일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대한항공 사례의 디테일을 제외하고, 대한항공이란 명칭을 삼성그룹으로 바꿔도 사정은 똑같다. SK·현대차·LG·롯데 등 거의 모든 재벌기업에서 총수일가와 독립된 이사회는 없다. 주주의 이해를 일부 충족시켜줄 이런저런 거버넌스위원회는 있겠지만, 보유지분 이상 과도하게 권한을 남용하는 총수일가의 ‘황제경영’을 막아줄 거버넌스위원회는 없다.

 

지난 5일 서울플라자호텔 4층 오키드룸에서 열린 국민연금 기금운영위원회 회의장에서 참여연대 등 시민사회노동단체 관계자들이 ‘국민연금의 수탁자책임 방기 규탄 및 주주활동 촉구’ 피케팅를 벌이고 있다. <사진=참여연대>

 

현행 법 체계에서 이들 재벌그룹의 경제권력 독점과 총수일가의 폭주를 제지할 수단이 정부에게 없는가. 만약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는 ‘칼’이 있음에도, 정부가 그 칼을 사용하지 않아 대한항공에서 ‘남매간의 전쟁’이 벌어졌다면. 또 온갖 잡스런 범죄까지 저질러 법의 심판을 받았던 이들이 재벌그룹사 회장 자리를 꿰차고 있다면. 정부 스스로 존재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게, 정부에게 권력을 위임한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

 

대한항공 먼저 보자. 국민연금은 지난해 대한항공의 지주회사인 한진칼 3월 정기주총에서 주주권을 행사해 정관변경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을 했다. 회사·자회사와 관련해 배임·횡령죄로 금고이상 형이 확정된 자에 대해 이사직을 제한하자는 내용이다. 당시 270억원 규모의 배임·횡령 혐의로 재판 중인 故 조양호 회장 낙마를 목표로 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였다. 주주제안은 반대(49.29%)보다 찬성표가 0.63%p 부족해 부결됐다. 0.63% 표만 더 끌어 모았어도, 조원태 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는 막을 수 있었다.

 

국민연금에겐 또한번의 기회가 있었다. 한진그룹 총수자리를 놓고 맞붙은 전쟁국면에서 親조원태 진영과 反조원태 진영이 확보한 주식은 30%대 초반으로 비슷하다. 국민연금이 보유한 4.1% 지분이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표다. 만약 국민연금이 나서 조원태 회장을 압박, 이사회 독립성 강화 및 지배구조 투명성 제고 방안을 요구했다면. 조 회장이 허울뿐인 쇄신안을 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게 합리적 추론이다.

 

국민연금이 대한항공 주총에서 시도했던 경영참여, 올 3월 줄줄이 예고된 재벌기업의 주주총회장에서는 볼 수 없다. 상법에 따라 주주제안이 허용되는 기한은 각 사의 주총 6주 전인데,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마지노선인 지난 5일 주주제안 안건을 의결하지 않아서다. 법이 허용한 칼을 정부가 사용하지 않아, 올해 삼성물산 정기주총에서 독립적인 사외이사 및 감사를 선출할 수 없게 됐다. 제일모직과의 불공정한 합병비율에 따라 6000억 이상 국민연금에 손해를 초래한 이사진에 대한 문책도 물 건너갔다. 국민연금의 구 삼성물산 지분은 11.21%(2015.7.17. 기준)다. 

 

국민연금이 할 일을 하지 않아, 3월 주총에서 효성그룹 조현준 회장의 지위를 위협하는 도전자가 없다. 같은 이유로 대림산업 이해욱 회장 역시 회장 자리를 보장받았다. 조 회장은 횡령·배임 등의 범죄를 저질러 실형을 선고받는 등 이미 수차례 사법당국의 심판을 받았다. 이 회장은 운전사를 상습 폭행한 혐의로 처벌을 받았고, 일감몰아주기를 통해 자신과 일가의 배를 불렸다. 효성그룹과 대림산업에 대한 국민연금 지분은 각각 9.97%(2019.9.30. 기준), 12.24%(2019.9.30. 기준)다.

 

2018년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국민연금. 지난해 12월 ‘국민연금기금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을 의결해, 수탁자책임에 관한 원칙을 이행할 기반을 구축했다.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이 없는 상태에서도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에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까지 만든 지금, 재벌기업 총수의 관행화된 월권을 방치하는 이유가 뭔가.

 

문재인 대통령이 약속한 재벌개혁을 포기한 게 아니라면, 국민연금은 이제라도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한다. 이번 3월 주총에 주주제안을 할 수 없다고, 주어진 책무가 없어지지 않는다. 지금 당장 국민연금이 지분을 가진 모든 재벌기업에 요구하라. 이사회 독립성 강화를 위해 총수일가의 지배를 받지 않는 독립이사를 선임하라고. 일감몰아주기 등 총수일가의 사익편취를 막기 위해, 모회사 주주가 자회사 이사진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다중대표소송제를 도입하라고.

 

정부에게 국민의 이름으로 준 칼은 쓰라고 준 것이다. 곪은 상처를 도려내,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터전을 만들라고 준 칼이다. 곪은 상처에 칼을 대지 않아, 온 몸이 썩어가게 만드는 우를 범하지 말았으면 한다. 국민의 위임한 권력, 감당할 수 없으면 내려놓는 게 마땅하다. 중기이코노미 논설위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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