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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예술을 읽다

검은 초록으로 변한 큰 캔버스 같은 창문 밖

Life is pain.ting…레지던시 풍경 #9. SAY 

기사입력2018-09-24 11:11

천안에 자리한 레지던시 스튜디오 공간은 한쪽 벽면이 전부 창문으로 되어 있고, 그 창밖으로는 산자락이 바로 코앞으로부터 이어진다. 창틀을 최소화한 커다란 창문 덕분에 시시각각 바뀌는 창밖과 계절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이 큰 사각 창문은, 마치 게으르지만 결코 쉬는 일도 없는 예술가가 매일 매일 새로 그려내는 큰 캔버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4월부터 8월까지 완두콩 컬러의 연한 풀잎들이 짙어지다 못해 검은 빛을 띠기도 하는 초록으로 변하는 동안 나는 식료품을 사러가는 일 외에는 거의 외출이 없었고, 때문에 수고롭게도 먼 길까지 기꺼이 와준 몇몇 작가들의 방문이 있었고, 가까운 지인들과 안부를 수화기 너머로 주고받으며 알게 된 웃지 못할 아니, 웃픈 헤프닝과 한 번의 낯선 방문이 있었다.

 

#1

산 밑자락이란 게 무색할 만큼 이곳의 수도는 맑지 못해서 물을 끓여 먹는다고 해도 바닥에 하얀 석회질 같은 가루가 가라앉곤 하는 터라 생수를 직접 공급해서 써야 하는 단점이 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7, 8월 내내 끙끙거리며 계단을 오르내리며 이고 온 생수박스는 빠르게 바닥을 보였고, 덕분에 멀리 있는 대형마트(26km 떨어져있는) 말고 가까운 편의점(7km 떨어진)에서 당분간 물을 사먹기로 했다(좀 더 비싸긴 해도 기름값과 시간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편이 나았다).

 

여섯 개 묶음 생수 두 박스를 트렁크에 싣고 그늘막에 자리한 편의점 야외 테이블 앞에 음료를 하나 놓고 앉아 숨을 돌릴 때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형식적인 안부도 생략하고 들려오는 첫 마디가 나 베니스 비엔날레 초대 받았어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축하보다는 혹시나 하는 염려가 먼저 스쳤지만, 이미 상기되어 있는 목소릴 듣고 쉬이 의심의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있자 그가 그런 마음을 눈치 챘는지 이어서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 초대 메일에 링크된 사이트로 들어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사짜는 절대 아니라며 힘주어 말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알고 초대 한 건지와 전시관련 몇 가지 질문을 보태어 답장을 보낸 상태이며, 그에 대한 답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더 이상 수화기를 사이에 둔 침묵이 도움이 될 것같지 않아 서둘러 정말 잘된 일이라고, 답신을 받으면 연락 달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바로 전화를 한 그는 답장을 받았다며, 어제보다 좀 더 확신에 찬 어조로 내게 내용을 전해주었다. 일종의 비영리 단체로 매년 비엔날레에 작가들을 섭외해 전시에 참여하는 곳으로, 일전에 꽤 유명한 작가들을 섭외해 왔기 때문에 그는 더 확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개개인의 크고 작은 일들이 약 천 가지의 색으로 쏟아져도 창밖으로 보이는 산자락은 아주 작은 보폭으로 시큰한 연둣빛에서 검은 초록으로 변했다.<사진제공=김윤아 작가>
그러나 작품 운송료와 체류비용, 비행기 티켓부터 전부 작가의 몫이었고 더구나 전시공간에 사용료(?)를 평당 400만원 정도를 내야 했기에 대략 어림잡아도 총 4000만원 정도의 금액이 드는 일 이라는 걸 추후에 알게 된 후에 그는 정보를 좀 더 알아보고 난 후 그 전시가 작가에게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더구나 공간에 작가가 지불하는 금액만 생각하더라도 비영리 단체도 아니지 않나. 하여튼, 그 짧은 4~5일의 기간 동안 한통의 이메일로 시작한 사건으로 롤러코스터를 탔던 그는 마지막 통화 때 결국 폭소하고 말았다.

 

, 내가 정말 웃긴 이유가 말야, 이 나이를 먹도록 작업해 오고 있는데 이런 보이스피싱 같은 것에 걸려들 줄 몰랐단 거야. 크하학.”

 

수화기 넘어 눈에 보일 지경으로 크게 웃던 그의 웃음소리에 나도 어찌나 웃었는지 눈가가 시큰할 지경이었다.

 

#2

장마철이 시작되고 창밖으로 보이는 초록 풍경들이 더욱 짙어지기 시작했다. 일기예보를 보고 예상은 했었건만 장마철이 싱겁게 끝날 무렵 반가운 이가 찾아왔다. 일 년 전 부산에 위치한 레지던시에 있을 때 서울에서 부산까지 와서 만나곤 거의 1년 만에 보는 그녀는 그 사이 결혼을 했다. 왜 말하지 않았냐고 서운해서 묻는 내게, 아무래도 작가들에게 연락하는 게 부담이 될 것 같아서 고민 끝에 하지 않기로 했었다고 했다.

 

작가끼리 하는 결혼이라는 건 대개 많은 이들이 걱정하는 일이다. 각자 작업을 영위해 나가기 위해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할 수 없는 일인지라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생활에 대해 주변인들은 염려 섞인 말을 건넬지언정 쉬이 단번에 축하받을 일이 못되곤 했다.

 

사랑하는 이와의 미래에 대한 자신의 확신과 달리, 불안한 주변의 시선에 지쳐했던 모습이 역력했던 일 년 전 보다 훨씬 생기가 도는 그녀는 작업도 더 잘 되어가고 생활도 조금씩 안정적이 되어 간다며 웃는 모습에 초록 청량감이 돌았다. 함께 하는 생활을 위해 남편도 본인도 일을 좀 더 늘렸지만 오히려 그 외의 시간을 보다 밀도 있게 보내게 되었다면서 내년에는 남편과의 2인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녀의 시선에서 전에는 미처 가늠하지 못했던 어떤 깊이가 느껴졌다.

 

#3

지난 7월 지난번 레지던시에서 함께 생활했던 작가로부터 전화를 한통 받았다. 모교의 선배이기도 한 모 기관 대표가 나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며, 아무래도 전시 때문인 듯한데 번호를 알려줘도 괜찮겠냐는 전화였다. 그렇게 통화하게 된 그는 내 작업을 실제로 보고 싶다며 지금 머물고 있는 레지던시에 다음날 방문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어왔다. 계속 스튜디오에 머물고 있는 터라 알았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약속한 시간이 조금 지나서 그가 도착했다며 전화벨이 울렸고, 유난히 무더웠던 그 날 오후 그는 티셔츠와 머리칼이 땀으로 흠뻑 젖은 채 작업실로 들어섰다. 자신이 운영하는 공간에 대한 설명과 자신의 이야기와 그가 생각하는 공간의 역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사실 나의 머릿속 반쯤은 지난 몇 개월의 시간이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지난해 여름부터 준비하던 올해 초 나름 큰 전시가 참으로 어이없는 일로 엎어졌고, 올해에는 했으면 했던 개인전 생각을 말끔히 접어두고서 레지던시 공모 외에는 별 다른 공모를 하지 않고 진행하던 작업만 하며 단순한 날들을 반복했다. 몇 번의 해외 전시에 대한 제안이 이메일을 통해 도착했지만, 운송료조차 지원되지 않는 전시라 정중히 모두 거절한 상태였다. 한 달에 한번 쯤 근황을 주고받는 모 작가의 자살소동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던 수요일에는 두 차례 소나기가 내렸다.

 

개개인의 크고 작은 일들이 약 천 가지의 색으로 쏟아져도 창밖으로 보이는 산자락은 아주 작은 보폭으로 시큰한 연둣빛에서 검은 초록으로 변했다. 창 밖에 시선을 둔 채 그 생각이 스칠 때 즈음, 일 년 반동안 진행하던 회화 작업 앞에서 한참을 서 있던 그가 뒤돌아서서 초대 개인전에 응해 주겠냐며 또박또박 제안했다. 그의 땀에 젖은 옷과 머릿칼이 에어컨 바람에 거의 완전히 건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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