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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전태일이 스러진 자리에 부는 차가운 바람

11월만이라도 그를 쓸쓸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기사입력2018-11-23 18:28
김준모 객원 기자 (gubtree@hanmail.net) 다른기사보기

1년 열두 달 중에서 11월은 가장 쓸쓸한 달입니다. 울긋불긋 피었던 단풍잎이 마른 잎으로 뒹구는 거리를 걷노라면, 가슴을 파고드는 스산한 바람을 이겨내기가 힘겹습니다. 화려했던 단풍은 이미 지고, 포근한 눈은 아직 내리지 않은 11월의 거리는 쓸쓸합니다.

 

쓸쓸한 11월의 거리에서 노동자들의 행렬을 만납니다. 해마다 11월이면 어김없이 열리는 노동자대회에서, 오래 전 11월의 거리에 울려 퍼졌던 쓸쓸한 외침을 듣습니다. 1970년 11월13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던 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단사, 스물 두 살의 노동자 전태일의 외침을 듣습니다.

 

지난 2012년 18대 대선 당시 민주통합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가 전태일 열사 42주기를 맞은 11월13일 서울 종로구 창신동 버들다리의 전태일 열사 동상에 헌화하고 있다.<사진=뉴시스>
노동자들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권리를 규정한 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노동자 전태일은 무척 기뻤다고 합니다. 그리고 있는 법조차 몰라서 법에 보장된 권리를 누리지 못했던 스스로를 ‘바보’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이제 노동자들의 실태를 알리기만 하면, 법을 집행하는 서울시와 노동청에서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전태일.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건 회유와 협박이었고, 전태일은 스스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마지막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고 하는 마지막 외침을 말입니다.

 

전태일이 마지막 외침을 남기고 불기둥으로 치솟았던 11월이 되니, 올해도 어김없이 연례행사처럼 노동자대회가 열립니다. 11월의 쓸쓸한 거리에서 노동자들이 열을 지어 행진합니다. 전태일의 뜻을 잇는다며 모인 노동자들이 탄력근로시간제 단위기간을 확대하려는 정부방침에 반대 목소리를 외칩니다.

 

촛불혁명으로 정권을 창출했다는 여당은 노동자들의 우려를 안심시키려 합니다. 탄력적근로시간제가 임금삭감 수단이나 장시간 연속근로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할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만들었으니 대화와 타협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루자고 손을 내밉니다.

 

솔직히 저는 복잡해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감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근로시간을 늘리고 줄이면서, 탄력적으로 일을 시키는게 탄력적근로시간제로 아는 저는 여당의 설명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회사가 필요할 때만 일을 시키면 전체 근로시간은 줄어들 테고, 일이 많을 때는 몰아서 근무하게 하면 장시간 연속근로가 많아질 텐데, 어떻게 임금삭감과 장시간 연속근로로 악용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걸까요?

 

근로기준법이 전태일의 편이 아니었듯이 법은 약한 사람들의 편이 아닌 것 같습니다. ‘노동법’이라고 부르지만, 그게 노동자를 위한 법인지 사용자를 위한 법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비정규직보호법’이 만들어진지 10년이 넘었는데, 그 10년동안 비정규직은 오히려 더 많아지고 더 보호받지 못하게 된 것 같기도 합니다. 힘없는 사람들을 보호할 것 같은 법조차도 힘있는 사람들의 편을 드는데, 탄력근로제를 확대하겠다면서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는 설명을 믿기 어렵습니다.

 

민주노총은 전태일이 목숨을 던진 11월의 거리를 총파업 집회로 메웠습니다. 대통령비서실장이 전교조와 민주노총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고 했다지요? 사실 국민 정서도 대기업의 정규직노동자와 공무원, 그들이 속한 노동조합을 약자라고 여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민주노총의 참여를 촉구하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민주노총의 총파업일을 하루 앞두고 공익위원안을 발표했습니다.

 

해고자와 실업자의 노조가입 허용, 공무원의 노조가입 확대, 노조전임자 급여지급 등의 내용은 기존 노동정책보다 진일보한 내용이고, 국제노동기구(ILO)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라니 정부의 의도를 의심할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대통령비서실장의 표현대로라면 사회적 약자가 아닌 전교조와 공무원노조, 대기업노조 간부들의 숙원을 들어주는 제안이긴 합니다. 게다가 탄력근로제를 반대하는 민주노총의 총파업 집회 하루 전날 발표라니 시기도 참 절묘합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발표한 공익위원안이 전교조와 대기업노조의 숙원을 담고 있더라도 의도한 건 아니겠지요? 설마 정부가 힘있는 노조에게 힘없는 노동자들을 버리고 이익을 취하는 사회적 합의를 제안한 건 아니겠지요?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노동자를 위해 투쟁한다는 민주노총이 그 제안을 받는 대신 노동자 모두, 특히 약한 노동자일수록 더 많은 고통을 받게될 제도를 받아들이진 않겠지요? 당연한 것이 당연히 지켜지지만은 않는 경험을 하다보니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평화시장 앞,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 위에는 전태일의 동상이 있습니다. 자신도 힘없는 노동자였지만, 그나마 처지가 나았던 재단사 전태일이 자신보다 더 힘없는 미싱사와 시다를 위해 뛰어다녔던 그 거리를 전태일 동상이 묵묵히 지키고 있습니다. 붉게 타올랐던 마른 잎은 11월의 찬바람에 실려 동상으로 서있는 그의 어깨에 머물기도 하겠지요.

 

1년 열두 달 중 가장 쓸쓸한 달 11월, 11월이 와도 전태일은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1년 열두 달 중 그를 가장 생각나게 하는 달, 11월만이라도 그를 쓸쓸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슴을 파고드는 스산한 바람에 모두 다 쓸쓸해져도 전태일만은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힘 있는 이들이 힘없는 이들의 어깨를 감싸는 모습을 보며, 청계천 다리의 전태일 동상이 슬며시 미소 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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