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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레지던시, 작품과 간단 작가노트 요구 뿐인데

Life is pain.ting…레지던시 풍경 #12. 12월 

기사입력2018-12-16 15:00

스튜디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의 톤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간다. 며칠 전에는 빛바랜 연두 빛이더니 이내 온통 따듯한 브라운 톤으로 변했다. 창문 바로 앞에 위치한 오래된 감나무도 주홍색 감들의 무게 때문에 가지가 늘어져 있었건만, 이제는 다 떨어지고 대여섯 개 정도의 감이 헐렁하게 겨우 달려 있을 뿐이다. 수북이 내려앉은 낙엽들이 가벼워진 몸무게와 달리 그 색들이 어찌나 깊던지.

 

대개 연말에 공모가 뜨다 보니, 내년 입주할 레지던시를 준비하는 작가들은 서류 준비로 바쁘다. 나 역시 이번 레지던시 기간이 내년 초면 마무리가 되니 그 다음 준비를 해야 한다. 보통 레지던시 입주신청서는 약력, 작가노트, 창작계획서, 포트폴리오가 기본이고 그 외에는 졸업증명서 혹은 주민등록 초본이나 등본을 요구하기도 한다. 또 더러는 전시한 도록이나 리플릿 등의 증거자료를 요구하는 곳도 있다. 도대체 왜 주민등록등본과 졸업증명서를 제출해야 하는지 알 수 없으나 뭐 어찌하겠는가.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야지.

 

그동안 몇몇 레지던시를 다니며 작성해 놓은 서류들이 있지만, 창작계획서는 매번 다시 쓸 수밖에 없고 작가노트도 조금씩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했다. 11월 동안 작성해 제출한 곳은 두 곳. 한 곳은 서탈(서류에서 탈락)했고, 나머지 한 곳은 1차 결과가 나오기 전이다.

 

대개 작가들이 서탈면탈(면접 후 탈락)’보다 낫다고 하지만 서탈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 물론 서류에서 붙을 경우 면접을 준비하느라 며칠 밤을 뜬 눈으로 보내고 면접 당일 아침 면접장소로 이동한다. 전국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전날 미리 도착해 숙소에 묵는 경우도 있다.

 

정작 투자한 시간과 거마 비용을 생각했을 때, 길어야 5분에서 10분 남짓 한 면접시간은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올해 초 면접이 내게 그러했다. 당시 부산에 있는 모 레지던시에 입주해 있던 상황이라 면접을 위해 하루 전날 미리 도착해서 예약해 둔 숙소에서 뜬 눈으로 밤을 보내고 면접장소에 도착했으나, 내게 주어진 프리젠테이션 시간은 단 2분이었다. 아무튼 사정이 그러하다 보니 면탈보다 서탈이 낫다는 말이 나올 법 하지만, 사실 면탈이든 서탈이든 쓴 맛이 감도는 건 매한가지.

 

말이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공모에 지원하기 위해 작성하거나 준비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작가들이 볼멘소리를 하는 건 아니다. 온라인 접수는커녕, CD로 굽거나 USB에 담는 것도 모자라 A4 클리어 파일에 작품 이미지와 서류를 정리해 넣어 우편 접수해야 하는 곳도 있다. 만약 응당 그래야 납득이 가는 상황이라면 귀찮은 게 대수랴. 아까도 말 했지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것인데.

 

내년 작업공간을 위해 책상 한 켠에 타이레놀을 쌓아두고, 12월을 작업이 아닌 컴퓨터 앞에서 보낼 수많은 날들이 벌써 지나간다.<사진제공=김윤아 작가>

 

하지만 작가노트와 약력까지는 이해할 수 있으나 향후 1년 동안의 창작 활동계획서 작업 파일마다 디지털 파일로 작품 이미지와 프린트한 이미지를 거기다가 CD까지 요구하는 것도 납득하기가 어렵다. 근작 10~15점을 보면 맥락 안에서 파악이 가능할 수도 있거니와, 작가노트에 응당 들어가게 될 작업성향에 대한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1년간 진행될 작품 수와 방법, 전시일정까지 요구하는 자세한 활동계획서는 억지스럽기 그지없다

 

게다가 프린트 비용과 파일, 우편비용까지 적게는 2~3만원이 넘게 들고 그렇게 보낸 서류는 반환되지 않는다. 더러 일정 기간 내에 직접 와서 찾아가도 된다는 곳도 있지만, 그 서류를 받자고 하루 시간을 내어 KTX에 오르는 작가는 많지 않다.

 

작가에게는 아방을 요구하면서 정작 시스템은 석기시대를 걷고 있네라는 말에 플로피 디스크 내라고 하지 않는 게 어디냐, 농을 주고받는 사이에는 묵은 체념도 함께 흐른다.

 

얼마 전 해외 레지던시 오픈콜이 뜬 곳이 있다며, 지인이 링크를 걸어 보내준 곳을 살펴보다가 눈에 띈 것이 요구하는 서류가 매우 간단하다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작성해야 할 것이 두 배는 되겠지라고 생각했으나, 근작 10점과 프로젝트 내용 설명 그리고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당신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싶은 게 있느냐라는 질문이 전부였다.

 

작가노트는 100단어를 넘지 말라는 요구가 있었는데 100단어라는 게 어느 정도 길이인지 가늠할 수 없어 작성하다 보니 채 여섯줄이 넘어가지 않는다. 한마디로 정확히 할 수 있는 중요한 말만 하라는 거다. 말도 안되는 말로 길게 늘이지 말고.

 

이렇게 간단하고 명료할 수가. 번역까지 다 해도 서류 작성을 마치는 데까지 시간이 하루가 다 걸리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외 레지던시 공모 요강을 몇 군데 더 찾아 살펴봤다. 역시나 요구하는 것은 작품과 간단한 작가노트 뿐.

 

믿어지지 않아 이게 혹시 해외작가들에게만 이렇고 자국민 작가들에게 요구하는 건 우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 국내작가용 서류를 다운받아 읽어보니 그 역시 요구하는 게 같았다.

 

내년 작업공간을 위해 책상 한 켠에 타이레놀을 쌓아두고, 12월을 작업이 아닌 컴퓨터 앞에서 보낼 수많은 날들이 벌써 지나간다. 이쯤되니 나는 조금 속상하다. 창밖으로는 전에 없이 색이 깊어진 낙엽들이 무게를 벗고 가볍게 뒹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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