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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身齊家조차 못한 고위공직 후보자를 보면서

정치를 해 治國平天下를 원했지만, 자리를 구걸하지 않았던 공자 

기사입력2019-04-15 17:38
문승용 객원 기자 (msy9769@nate.com) 다른기사보기
문승용 박사(중국 문학,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원)
『논어』「자한(子罕)」편에는 제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으면, 상자에 넣어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가격을 쳐주는 이를 찾아서 파시겠습니까?(有美玉於斯, 韞匵而藏諸? 求善賈而沽諸?)”라고 물었다. 이에 공자는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좋은 가격을 쳐줄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다.(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라고 대답했다.

이 대화는 자신의 뜻을 인정해 주는 군주를 만났을 경우 정치계 투신 여부를 아름다운 옥에 비유해 자공과 공자가 묻고 답하는 장면이다. 반면 노자는 훌륭한 장사꾼은 좋은 물건이 없는 것처럼 깊이 숨겨두겠다고 했다. 아무리 훌륭한 재주를 가졌더라도 노자는 자신의 재주를 내 보이려 스스로 세상에 나대지는 않겠다고 해 공자와 매우 다른 태도를 보였다.

공자의 묘지 바로 옆에는 공자의 제자 자공이 시묘살이를 했던 움막 자리에 ‘자공여막처(子貢廬幕處)’라는 표지석이 있다.<사진=문승용 박사 제공>
자공은 공자의 3000명 제자 가운데 십철(十哲)이라 해, 이른바 공자의 10대제자 중 한 사람이다. 공자가 죽었을 때 다른 제자들이 삼년상을 치르고 여기저기로 떠나고 난 다음에도, 자공은 삼년상을 한번 더 치른 제자로서 공자에 대한 존경이 매우 각별했다.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에는 공자와 그의 후손들이 묻힌 공림(孔林)이 있는데, 공자의 묘 곁에는 시묘살이를 했던 자공의 움막 표지석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자공은 여러 제자들 가운데 장사에 능했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마천『사기』는 다른 제자들에 비해 자공을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자공은 물건을 내다팔고 사들이는 것을 잘해 시세에 맞춰 싸게 물건을 사 비싸게 팔아 이윤을 남겨 부자가 됐다.(子貢好廢擧, 與時轉貨貲.)”라고 기록돼있다. 

또『논어』에서는 제자들 가운데 자공이 ‘말하는 것’에 뛰어나다 했으니, 그가 다른 사람들과 흥정을 잘해 물건을 사고팔며 큰 이윤을 남겼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공자가 십수년 동안세상을 떠돌면서 자신을 알아줄 군주를 찾아다닐 수 있었던 것도, 자공이 공자에게 경제적인 후원을 꾸준히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공자를 마치 사고파는 옥 같이 아름다운 상품에 비유해 세상에 나가 정치활동을 하시겠냐고 물은 것도 상인다운 자공의 발상이라 할 수 있다. 공자의 유가사상이 개창한 정치 이상이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인 만큼, 공자가 정치활동을 하기 위해 자신을 알아줄 군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것은 매우 당연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들은 공자를 교육가이면서 사상가로 알고 있지만, 공자 자신은 일찍이 세상을 바르게 다스릴 정치인이 되고자했다. 공자는 나이 쉰 살이 넘어서야 노(魯)나라 벼슬에 잠시 올랐지만, 노나라 제후가 정사에 힘쓰지 않자 자리에서 물러나 자신을 인정해줄 군주를 찾아 나섰다. 이것을 일컬어서 주유천하(周遊天下)라고 한다. 결국 자신을 등용해주는 군주가 없자 고향에 돌아와 제자들을 양성하고, 이전 성현들의 말씀을 정리하고 편찬하다가 73세에 생을 마쳤다.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曲阜)에 있는 공자의 묘지다. 곡부에는 공자의 위패(位牌) 및 신주(神主)를 모시는 사당인 공묘(孔廟), 공자의 자손들이 사는 공부(孔府) 그리고 공자와 그 후손들의 묘지가 있는 공림(孔林)이 있다. 청(淸) 왕조가 멸망하고 사회주의국가가 들어선 이래 중국에서 공자는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최근 들어 공자의 사상은 새롭게 평가를 받고 있다.<사진=문승용 박사 제공>
오늘날로 치자면 공자는 자신의 정치 이상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한 실패한 정치인일 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가의 이념인 인(仁) 사상은 이후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까지 깊은 영향을 끼치고 성인(聖人)으로 받들어져 왔으니, 공자의 삶이 결코 실패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공자가 늘그막에까지 자신의 정치 이상을 펴고자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각 나라 군주에게 무턱대고 자리를 구걸하고 다녔던 것은 아니다. 사마천의『사기』는 “나라에 바른 도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데 관리로서 봉록을 받아먹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國無道, 穀, 恥也.)”라는 공자의 말을 전하고 있다. 군주가 바른 정치를 펼치지 못해 도리가 무너진 나라에서 관리로서 자리를 꿰차고 앉아 봉록을 받아먹는 일은 삼가라는 의미다. 허긴 이렇듯 공자처럼 깐깐한 이를 어떤 군주가 신하로 반겨 맞아 기꺼이 정치를 맡길까 싶기도 하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에서 이상적인 선례를 남긴 이로『삼국지』의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을 들곤 한다. 제갈량과 같은 인재가 꼭 필요했던 유비는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이 아니면 누가 막중한 나랏일을 할 수 있겠냐며 자부했던 제갈량도, 삼고초려의 극진한 예를 받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유비를 주군으로 모시며 평생토록 신하로서 최선을 다했다. 이들의 관계가 마치 물과 물고기와 같이 친밀하고 뗄 수 없다 해 수어지교(水魚之交)라고 한다. 

요사이 나라에 인재가 없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많다. 지금은 세상이 달라져 한 군주가 평생토록 권좌를 지키는 왕조시대도 아니니,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할 신하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오늘날 나라의 중대한 업무를 맡아야 할 관리를 물색해 올린 후보자들이 하나같이 적격자가 아니라 해 한창 논란을 벌어지고 있다. 

인사청문회는 고위공직 후보자들이 정말 그 자리에서 제대로 업무를 수행할 자질이 있는지, 또 어떤 정치적인 식견과 신념을 가졌는지를 들어보고 검증하는 자리다. 그럼에도 ‘어째 최소한의 도덕적인 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했냐’는 호통을 듣다가,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하는 후보자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현행법을 어긴 것은 아니다’며 버티기를 하는 후보자들을 보고 있자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공자는 당시 군주들에게 자리를 구걸하지 않았다. 제갈량 역시 유비의 간절한 초빙에 못이기는 척하며 응했다. 오늘날 우리들이 고위공직 후보자들에게 거는 기대가 국민 눈높이를 너무 높이 끌어 올린 게 아닌가 싶어 그저 씁쓸할 따름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한국외대 중국연구소 문승용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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