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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예술을 읽다

한국 미술의 ‘미스터 선샤인’을 찾아서

개화기 조선을 상상하다…질풍노도 시기와 같은 근현대 미술 나들이 

기사입력2018-09-08 09:30
김태현 미술평론가 (elizabeth0711@gmail.com) 다른기사보기

한국의 근현대미술사를 공부하다보면 급작스런 신문물의 유입으로, 동시대에 화풍이 변화하던 시기를 두번 발견할 수 있다. 그 중 한번은 구한말의 개화기이고, 다른 한번은 한국전쟁 직후다

 

오지호, 남향집, 1939, 캔버스에 유채, 80×65cm<국립현대미술관>
특히 개화기 시기는 기존 조선이라는 500여년 동안 유지되던 문화와 개화라는 물결하에 이전에 전혀 접하지 못했던 양이문화가 충돌하고 섞이기 시작한 시대다. 당대 미술가들의 모습과 작품, 행동은 다른 시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고 있고, 우리의 상상 그 이상으로 역동적으로 급변하던 시대였다. 개화기의 조선엔 워낙에 다양한 문화의 배경을 가진 인물상들이 살아갔기에, 그들의 시점 하나하나로 같은 시대를 다각도로 서술이 가능한 시기이기도 한 것이다.

 

미스터 선샤인으로 다시 보는 개화기

 

얼마전부터 구한말, 개화기 시기를 살아간 우리네 조상, 특히 의병의 활약을 다룬 드라마인 미스터 선샤인이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다. 흥행 보증수표로 불릴만한 연출가와 극작가가 의기투합하고, 430억원이라는 엄청난 투자가 이뤄진 이 드라마는 이런 거액의 투자금이 어디에 투입됐는지 짐작할 수 있을 만큼의 스케일과 디테일을 보여주고 있다.

 

이 드라마는 그 개화기 극과 극의 지점에 서 있는 조선의 양반집 애기씨와 미국에서 돌아온 노비출신 장교의 연정을 중심으로 개화기라는 배경답게 조선인, 미국인, 일본인, 러시아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를 대표하는 군상들을 출현시킨다. 이들이 서로 다른 문화 앞에서 갈등하고 충돌하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며 100여년 전의 시대상을 우리 앞에 흥미롭게 그려낸다. 노비제가 철폐된 조선 내부의 상황은 물론이거니와, 정보가 부족한 외국인들이 조선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과 급변하는 조선시대 말기의 문화를 다양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이 드라마가 기존의 구한말 개화기를 다룬 작품과 다르게 관람할 수 있는 포인트다.

 

그 예로 미스터 선샤인에 등장하는 춘식이의 복식을 살펴보면, 문화적 충격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춘식이는 도화서 출신으로 흥신소와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다(갑오개혁 후 도화서는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고희동, 자화상, 1915, 캔버스에 유채, 61×46cm<국립현대미술관>
춘식이는 사람을 찾아달라는 요청에 붓으로 슥슥 몽타주를 그려주는 역할을 한다. 그의 외관은 늘 상투 튼 머리 위에 서양식 모자를 비스듬히 눌러쓰고 다닌다. 아무도 그러한 그의 모습에 핀잔을 주는 이는 없다. 마냥 당시의 춘식이와 같은 모습이 거짓이라고, 역사적 고증 사실에 대해 정면으로 반발하기에는 그럴 수 있었을지도 몰라하는 생각도 든다. 격동의 개화기에 충분히 있음직한 일로 여겨지니 말이다.

 

개화기 이후 한국 근현대 미술의 서막

 

화선지에 먹으로 그리던 서화에서 미술로 변화하게 된 개화기에는 유화가 처음 한국 미술사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1886년에 태어나 취미로 서화를 하다, 1908년에 최초의 미술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서양화를 전공하고, 1915년 귀국해 그림을 선보인 고희동이 바로 그 주역이다.

 

고희동이 미술도구를 들고 사생을 나가면, 동네 꼬마들에게 엿장수로 오해받고 물감더러 닭똥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을 만큼 유화의 도구조차 생경했던 시절이다. 그러나 고희동 역시 1920년대 중반부터 재료도 구하기 어려웠고 자신의 그림이 크게 인정받지 못하자 다시 서화로 돌아섰다.

 

고희동은 유화로 그림을 그린 기간도 짧고 귀국해 작품활동을 하는 동안 미술교육과 각종 협회를 조직해 활동하는데 치중해 남아 있는 유화작품이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미술가이기보다 한국미술의 근대화에 기여한 인물로 그의 업적은 빛나며, 남아있는 그의 유화작품은 매우 희소성이 있다. 고희동의 대표작인 자화상을 보면 단정한 옷매무새로 권위를 표현하기보다는 호방하게 풀어헤친 앞섬과 부채로 자신의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뒷 배경의 책들과 영어로 서명한 것을 살펴보면, 엘리트층이라는 권위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그림은 전형적인 도쿄미술대학의 사실주의와 인상주의가 합쳐진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휴버트 보스, 서울풍경, 1898, 캔버스에 유채, 31×69cm<국립현대미술관>

 

고희동 이후 김찬영, 김관호, 이종우, 나혜석 등 도쿄미술대학 졸업생들이 귀국하고 나서 점차 서양화라는 유화로 그린 그림이 한국의 화단에서 주역의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중 김관호는 일본의 문부성 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수상할 만큼 재능이 있는 미술가였다.

 

내가 사랑한 미술관:근대의 걸작전

 

질풍노도의 시기와 같은 한국의 초기 근현대 미술을 항상 만나볼 수 있는 미술관이 있다. 바로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현재 내가 사랑한 미술관:근대의 걸작전1014일까지 진행 중이며, 그 다음 전시로 제국의 황혼, 근대의 여명:근대 전환기 궁중 회화전이 예정돼 있다.

 

첫 번째 전시에는 앞서 언급한 고희동의 자화상이 전시되며, 그 밖에 한국 최초의 추상화가인 주경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다. 이후 구본웅, 이인성, 박래현, 김환기 등 한국 근현대 미술계의 계보를 잇는 미술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개화기 미술가들은 주요한 국가예술기관이었던 도화서가 폐지되고 미술사들에게 예술가라는 명칭으로 개별적으로 활동하며 자생적으로 협회를 조직해 활동하는 형식으로 변화했다. 이는 미술가들의 입장에서 전세계 미술인들과 경쟁해야 하는 무한경쟁시대의 서막이 열린 것과도 같다. 그 서막을 연 미술가들은 그 당시에 오늘날만큼 사회적 인지도가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생의 노력을 투자해 작품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 노력들이 이어져 오늘날 한국미술이 존재하고 있다. 그 역사를 담담하게 지켜봐 온 덕수궁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하며 텔레비전에 나오는 근대의 풍경을 함께 상상해 본다면 더욱 즐거운 미술관 나들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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