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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스승이지만, 무능한 가장이었던 공자(孔子)

집안생계를 돌보지 않은 소크라테스, 그런데 그의 아내가 악처(?)  

기사입력2019-01-02 10:03
문승용 객원 기자 (msy9769@nate.com) 다른기사보기

문승용 박사(중국 문학,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원
전통적으로 우리사회에서는 학교 선생님은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로서 받들어야하는 존재, 일반 직업인과 달리 보는 경향이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스승의 표상으로 삼는 인물이라면 역시 공자를 들 수 있다.  

 

공자를 인류의 영원한 스승, 만세사표(萬世師表)로 떠받드는 이유는 그가 처음으로 학교를 열어 보통 백성들까지도 학생으로 받아들여 가르쳤기 때문이다. 공자가 가르침에 신분계층을 따지지 않았다 해 유교무류(有敎無類)라 한다. 또 사랑[仁]과 정의[義]를 근간으로 유가(儒家)학파를 세웠고, 이후 시대마다 얼마간 들고나는 부침이 있었지만, 유가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대표적인 사상으로 오늘날까지 쭉 이어왔다.

 

공자가 태어난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 부근 니산(尼山)에 세운 공자의 동상. 공자의 수제자가 72명이었다는 것에 착안하여 72m 높이로 조성됐다. 중국 정부는 이곳을 성역화(聖域化)해, 많은 이들이 와서 참배하고 공자의 사상을 학습한다.<사진=문승용박사>
공자가 살았던 기원전 6세기 중국의 춘추시대는 각 제후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던 분란의 시대였다. 그렇듯 어지럽던 시대를 인의(仁義)의 정치사상으로 바로잡겠다면서 세상을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던 것을 두고 주유천하(周遊天下)라 일컫는다. 당시에는 공자의 정치사상을 인정해 그에게 높은 관직을 주는 왕이나 제후가 없었기 때문에, 결국 공자는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키우고 저술활동을 하다 쓸쓸히 죽어야만 했다. 그런 만큼 공자는 정치적으로 성공하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궁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공자는 평생 어떻게 가족을 부양하며 생계를 이어갔을까? 공자는 어린 시절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목동이나 창고지기 같은 일을 했으며, 나이 50세 즈음이 돼서야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면서, 자신의 고향인 노(魯)나라에서 법률을 담당하는 사구(司寇)의 벼슬에 잠시 올랐지만 오래 이어가지는 못했다. 이후 제자들과 함께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면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생활을 했으니, 집안생계도 정상적으로 꾸려갈 수 없었을 것이다.

 

공자와 더불어 인류 성인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소크라테스도 집안살림에 무심했던 것 같다. 흔한 우스갯소리로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와 같은 철학가가 나온 이유도 그의 아내가 악독했기 때문이라 한다. 집에 일찍 들어가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즐겁게 보내지 못하고, 소크라테스가 당시 학자들이나 정치인·장군 등 여러 직종의 사람들과 토론한게 밑거름이 돼, 나중에 사상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집안을 돌보지 않고 “너 자신을 알라”며, 인간과 인간 삶에 대한 고민을 혼자 짊어진 것처럼 매일 저자거리를 돌아다니며 토론만 하고 집안을 돌보지 않아,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악처가 된 것은 아닐까?

 

소크라테스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토론하고 때로는 스승의 역할을 하다 보니, 종종 그의 가르침에 감사하다며 얼마간의 돈을 주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 돈을 받지 않고 함께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는 데에 다 써버렸다고 한다. 이런 남편을 보고 악독해지지 않을 아내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공자의 아내는 어떠했을까? 유가 경전의 하나인 『예기(禮記)』와 공자의 삶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한『공자가어(孔子家語)』는 공자가 자신의 아내를 내쫓았다는 ‘공자출처(孔子出妻)’ 이야기를 전한다. 공자와 같은 성인이 아내를 내쫓았을리 없다며, 후대 유생(儒生)들은 아예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으려는 이가 많다. 그렇지만 『예기』는 유가의 주요 경전 가운데 하나여서, 공자가 아내를 내쫓았다는 기록을 그저 무시해 버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공자는 19살 즈음에 어머니의 주도로 송(宋)나라 지역 기관(亓官) 씨 집안의 딸과 결혼을  했다. 다음 해 외아들 공리(孔鯉)를 두었고, 이후 딸을 하나 더 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이후 공자가 자신의 아내를 내쫓았다는 것이다.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에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 해,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유가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공자는 그의 아내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지 않았다. 설사 공자의 아내가 칠거지악에 걸려 쫓겨났더라도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혹시 공자 자신이 아니었을까? 소크라테스처럼 공자가 매일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고 다른 사상가들과 갑론을박 정치를 논하고 다니기만 했지, 정작 집안에는 경제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공자의 아내는 남편에게 고분고분 순종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공자는 이를 빌미로 아내를 내친 것은 아닐까 싶다.

 

공자가 당시 학생들을 은행나무 단에서 가르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공자 사당에 세워진 행단(杏壇).<사진=문승용박사>
공자가 학교를 열고 학생들을 받아들이면서 소크라테스처럼 학비를 전혀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논어』 「술이(述而)」편에서 공자는 속수(束脩) 이상의 예를 행한 이라면 누구나 가르쳤다고 했다. 여기에서 속수는 당시 예법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을 찾아갈 때, 최소한의 예물로서 ‘육포(肉脯) 한 묶음’ 정도를 말한다. 이것은 학생이 스승을 만나 최소한의 예를 갖추는 것이지 학비의 대가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후대에는 이것을 두고 공자가 학비를 받고 평민들까지 받아들여 사립학교를 열었던 최초의 인물로 평가한다.

 

소크라테스나 공자의 시대에는 특별한 소득없이 집안생계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면서도 어떻게든 살아갔던 때였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선생님들도 보통 직업인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집안의 가장이자 교육자로서 공자를 우리들은 또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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