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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권력에 굽히지 않았던 맹자의 ‘정경유착’

기업인, 돈 필요한 정치인 쥐락펴락…맹자가 황금을 거부한 사연 

기사입력2019-01-16 10:10
문승용 객원 기자 (msy9769@nate.com) 다른기사보기

문승용 박사(중국 문학,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원
공자가 그의 아내를 내쫓아서 공자출처(孔子出妻)’라는 말이 생겼다면, 맹자와 그의 아내는 화목하게 잘 지냈던 것일까? ()나라 문제(文帝) 때 박사를 지냈던 한영(韓嬰, B.C.200?~B.C.130)이 지은 책으로 알려진 한시외전(韓詩外傳)’에는 맹자가 아내를 내쫓으려고 하였다(孟子欲休妻)’는 기록이 나온다. 공자가 아내를 내쫓았다고 해서 출처(出妻)’라고 하는데 비해, 맹자는 아내의 직분을 그만 두게 한다는 의미에서 휴처(休妻)’라는 말에 ‘~하려고 했다라고 해서 조동사 ()’자가 붙어 있다.

 

맹자가 그의 아내를 내쫓으려고 했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느 날 맹자가 어머니에게 아내를 쫓아내야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는 어째서 그러느냐고 이유를 묻자, 맹자는 자기가 방에 들어가는데 아내가 방에 다소곳이 앉아 있지 않고 예의 없이 거만하게 앉아 있더라는 것이었다. 맹자의 어머니는 그렇다면 방에 들어갈 때 인기척을 했느냐고 맹자에게 물었다. 맹자가 인기척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방에 들어갔다고 대답하자, 맹자의 어머니는 인기척도 없이 방에 들어간 것이 오히려 예의가 없는 것이라고 맹자를 탓해 맹자의 아내가 쫓겨나는 일을 피할 수 있었다.

 

이 일화를 통해서 맹자가 공자처럼 아내를 내쫓은 것은 아니었지만, 맹자 역시 그의 아내와 화목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째서인지 그것과 관련해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이러저러한 정황을 통해서 공자도 맹자도 가정생활이 원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대학(大學)에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고 해, 자신이 수양을 잘하고 집안을 가지런히 해야 나라와 천하를 올바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이라고 했는데, 공자나 맹자가 가정은 원만하게 잘 돌보지 못했으면서도 세상 정치를 바르게 해야 한다는 정치논의를 강조했다는 것이 좀 모순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에 있는 맹자의 사당. 칠편이구(七篇貽矩)라는 편액은 청(淸)나라 옹정제(雍正帝)가 직접 쓴 것이다. 칠편(七篇)은 ‘맹자’ 책의 편수를 말하고, 이구(貽矩)는 맹자의 교훈이 후대 세상에 표준이 되는 가르침을 주었다는 의미다.<사진=문승용 박사>
그렇다면 혹시 맹자의 아내도 공자의 아내의 경우처럼 집안 살림은 돌보지 않았던 남편을 원망했고, 그 때문에 맹자 역시 그런 아내가 밉게 보였던 것을 아니었을까?

 

공자는 나이 쉰 살 즈음에 잠깐 벼슬을 했다가 십 수년 동안 변변한 벌이도 없이 세상을 다니며, 자신의 이상정치를 설파하고 다니느라 가족 생계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맹자도 공자처럼 특별한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채 20여년 동안 제자들을 이끌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정의로운 정치이상을 펼칠 것을 주장하다가, 결국 인정해 주는 왕이 아무도 없자 고향에 돌아와 제자들을 키우고 저술활동을 하다가 죽었다.

 

그렇지만 공자가 궁핍하게 다녔던 것에 비해 맹자는 여러 나라에서 비교적 융성하게 대접을 잘 받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공손추하(公孫丑下)’ 편에는 제()나라 왕이 맹자에게 겸금(兼金) 100()을 주었는데 받지 않았고, ()나라에서 준 70()과 설()나라에서 준 50()은 받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겸금은 당시 보통의 금보다도 가격이 갑절이나 나가던 품질이 좋은 금을 일컫는다. 당시 일()은 무게의 단위로서, 24()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도량형의 기준이 시대마다 지역마다 달랐기 때문에 오늘날의 무게 단위로 정확하게 환산할 수는 없다. 그나마 검증할 수 있는 시대로서 맹자의 때와 비교적 가까운 한()나라 때 1()16그램 정도였다. 한나라 때의 도량형을 기준으로 보면, 1()은 약 384그램 정도이니 100()3.84킬로그램이다. 지금 금 시세가 1그램에 47000원 정도이니까, 100()은 대략 18억원 정도다.

 

지금 금 시세로 대략, 맹자가 제나라에서 준 18억원은 받지 않았고 송나라와 설나라에서 준 12억원과 9억원은 받았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맹자가 제나라에서 준 18억원에 상당하는 겸금을 받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나라 위무왕(威武王)이 불효자로 악명이 높았기 때문에 그가 주는 돈은 명예롭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남성(河南省) 중부 허창박물관(許昌博物館)에 전시돼 있는 수레. 춘추전국시대 공자나 맹자도 이런 종류의 수레를 타고 당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정치활동을 했을 것이다.<사진=문승용 박사>

 

일찍이 공자가 이익이 되는 것을 보거든 그것이 옳은지를 생각하라고 해서 견리사의(見利思義)라고 했듯이, 맹자 역시 불효자가 주는 돈은 의롭지 않으니 받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 준 돈을 받았던 것은, 자신처럼 정치활동을 하기 위해 멀고도 험한 길을 다니려면 여러모로 비용이 필요할 것이니 예를 갖춰서 주는 노자[]는 받을 수 있다고 여겼다.

 

등문공상(滕文公上)’ 편에는 자신과 같은 정치인은 정신을 수고롭게 하는 노심자(勞心者)이고 일반 백성들은 힘을 수고롭게 해 살아가는 노력자(勞力者)라고 해, 몸을 써서 일할 시간이 없는 정치인들을 먹고 살 수 있도록 왕이나 백성들이 후원하는 것은 천하의 통용된 의리[通義]라고 말해 오늘날로 치면 정당한 정치자금은 떳떳하게 받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정치인들이 정치활동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여기저기에서 정치자금을 받거나 때로는 뇌물을 챙기게 된 빌미를 일찍이 맹자가 제공해 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맹자가 등문공하(滕文公下)’편에서 대장부의 자질에 대해 말하기를, “부귀하더라도 내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며, 빈천하더라도 나의 절개를 바꾸지 못하며, 힘으로 위협하더라도 나의 지조를 굽힐 수 없다(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라고 말했던 것만 보더라도 맹자는 돈과 권력에 자신의 지조나 신념을 꺾으며 살지는 않았다.

 

정치인은 손님이 돈을 주고 가자는 대로 택시를 몰아가는 택시기사와 같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정치인이라면 돈이 필요하기 마련이고, 그러한 사정을 잘 아는 기업인들은 그들에게 정치자금이라는 허울을 쓴 뇌물을 주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세상을 이리저리 휘두르고 싶어 하기 마련일 것이다.

 

또 일부 국민들은 이러한 기업인들이 정직하지 못한 정치자금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결국 나라 경제에 도움을 줘 국민들이 이 정도라도 먹고 사는 데에도 기여한 것이니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여기는 이도 있는 것 같다. 오늘날 정치와 경제가 돈을 매개로 몇몇 부조리한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밀착돼 그들만의 권력과 기득권을 누리려고 하는 것을 공자나 맹자가 보았다면 또 어찌 여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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