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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예술을 읽다

다양한 글로 여성 주체성 갖게 한 서양화가 나혜석

여성 초상화조차 없던 시절 한국 최초로 개인전 연 ‘시대의 표정’㊤ 

기사입력2019-04-10 12:38
김태현 미술평론가 (elizabeth0711@gmail.com) 다른기사보기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72×59cm, 1928<출처=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는 누구일까? 미술대학이 생긴 직후에 고등교육을 받는 여성의 수가 매우 적었을 때를 제외하고, 미술대학 입학생의 성비를 살펴보면 단연 여자의 수가 우세하다. 그러나 오늘날 미술사에 기록된 여성 미술가들의 수는 남성 미술가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다.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보았을 때 조선시대는 더욱 심각했다. 아예 여성의 초상화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신분이 높은 왕의 초상화는 많이 남아 있어도 왕비의 얼굴은 드물게 기록돼 있다. 여성 화가들은커녕 여성의 얼굴도 기록되기 어려웠던 시기였다. 간혹 남아있는 왕족이나 사대부 여인들의 초상은 사후 화가들이 측근들의 증언에 따라 추정해 그린 것이다. 그러나 기생도가 왕족이나 사대부 여인들의 초상보다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신분 차이에 따라서도 그 영향이 있다.

 

나혜석의 레코드=이러한 사상적 뿌리로, 한국 근현대미술이 시작되던 시점인 1900년대 초반에 한국 최초라는 여러 타이틀을 단 여성 예술인이 등장했다. 바로 미술, 문학 그리고 사회운동까지 다양한 측면에서 활동하며 인정을 받은 나혜석이다.

 

‘나부’, 캔버스에 유채, 1928(추정)<출처=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한국 최초로 세계여행을 떠난 여성이자, 한국 최초로 개인전을 열어 판매 수익을 거둔 전업 작가였다(당시 미술유학을 한 남성 작가들도 10년 이내에 절필하는 경우가 다수였다).

 

또한 다양한 글로 한국 여성들이 주체성을 갖도록 계몽의식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 당시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쉽게 용인할 수 없었던 이혼의 과정과, 이후 자신의 입지를 단단하게 표명했다는 사실만으로 엄청난 지탄을 받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다시피 됐다. 이는 그의 많은 업적들을 격하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나혜석은 동경 여자미술전문학교 유화과에 입학해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나혜석 이후 박래현, 천경자 등 주요 여성 미술가들이 수학한 곳이다. 나혜석의 초기 미술작품은 그가 학습했을 당시 성행했던 일본의 외광파 영향을 받은 풍경화가 주를 이뤘다.

 

일본의 외광파란 프랑스의 인상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화풍으로, 빛이 중심이 돼 거친 터치에 밝은 색채로 작품을 묘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같은 특징은 당시 일본에서 유학했던 미술가에게서 모두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나혜석은 무분별하게 일본의 화풍을 추종하고, 수용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글 ‘1년 만에 본 경성의 잡감’(개벽, 19477)에서, 나혜석은 묘법이나 도구에 대한 선택뿐만 아니라 향토, 국민성을 통한 개성의 표현이 서양과 다른 조선 특유의 표현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중기이코노미 객원=김태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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