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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임 수틴…프랑스는 왜 예술종주국서 밀려났을까

몽마르트르의 막장 파티와 몽파르나스에 묻힌 화가㊦ 

기사입력2019-06-15 17:00

몽마르트르의 막장 파티와 몽파르나스에 묻힌 화가㊦

파리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대부분 몽마르트르(Montmartre) 언덕을 찾는다그 이유중 하나가 이 산동네에 얽힌 예술가들 이야기 때문이다아기자기한 산동네딱 맞는 배경이다그러나 많은 방문객들은 몽파르나스(Montparnasse)에 대한 미술역사는 잘 모른다몽파르나스에는 파리의 유일한 고층건물과 베르사유 궁전으로 가는 기차를 탈 수 있는 역이 있다특별한 게 없어서 관광객들은 잘 가지 않는다이제 여행철도 다가오고 하니 20세기 초 이 두 군데에서 일어난 미술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하나는 해피엔딩하나는 비극여행객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피카소를 비롯한 후대에 유명한 작가들은 몽마르트르의 바토 라브와르라는 작업실에서 작품하고 놀고 했다. 그 건물은 물론 온방시설과 수돗물이 없었던 건물이다. 피카소는 1912년 세느강을 건너 몽마르트르의 반대쪽인 몽파르나스로 이사했다. 몽마르트르로 오는 많은 관광객들을 피해서. 몽파르나스에 다른 예술인들이 그때쯤 모여들기 시작했다.

 

로마노프 러시아 왕정을 피해온 러시아 및 동유럽 예술가 특히 유태인들이 많았다. 이때 몽파르나스에 등장한 예술가들은 몽마르트르파를 비롯해 수틴, 모딜리아니, 샤갈 등등. 이들은 몽파르나스에서 피카소를 비롯한 몽마르트르의 예술가로부터 다시 한 번 현대미술을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막장 파티는 몽파르나스에서도 계속됐다. 1917년 조지 브라크가 1차 대전에서 부상해서 돌아오자, 마리 바실리프가 몽파르나스에서 위로 파티를 열었다. 모딜리아니는 주사가 심해 초대하지 않았는데, 어떻게(동네가 좁으니) 파티가 있는걸 알고 나타났다. 술이 얼큰하게 취하자 모딜리아니는 권총을 빼들었다. 조그만 체구의 여성인 바실리프는 모딜리아니를 문밖으로 걷어찼고 피카소는 잽싸게 문을 잠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술가들과 술 먹으면 사고가 많이 난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때에 대표적인 유태인 미술가는 카임 수틴(Chaim Soutine)이다. 유태인들은 역사적으로 종교 때문에 갖은 핍박과 인종차별을 당했다. 그들은 독일어에서 변형된 Yiddish라는 언어를 구사했다. 수틴은 민스크에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1913년 파리로 왔을 때 불어를 한마디도 못했고 검은 피부에 검정머리로, 이방인으로 분류됐다.

 

작가로 지지리 못 살다가 반즈콜렉션의 설립자인 미국인 앨버트 반즈가 1922년 파리로 와서 수틴의 작품에 반해 총 52점을 사서 미국으로 가져갔다. 현대역사상 중요한 콜렉터가 한방에 사재기한 기록이다.

 

카임 수틴(Chaim Soutine, 1893~1943), Le Boeuf, 1920.<출처=christies.com>
그러나 수틴의 인생은 순조롭지 못했다. 나중에 드쿠니가 가장 존경한다는 수틴의 스타일은 적과 흑의 색감으로 너무 강렬했다. 소수의 평론가들은 수틴 등 유태인 작가들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긴 했으나,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들의 예술성을 우습게 보았을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적으로 이들이 더럽고 지저분해서 위생상태가 안좋다고 조롱하고 업신여기며, 이들이 프랑스 문화를 물들이고 있다고 공격했다. 왜 프랑스가 20세기에 들어서 예술의 종주국에서 밀려났는지 알수 있는 부분이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파리는 독일군의 점령 하에 들어가면서 이 예술가들은 다시 이방인들이 됐다. 샤갈을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은 미국으로 도망갔다. 수틴은 몇 번 파리의 미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으려고 시도했지만, 예술가로서 도저히 정리가 안된 사람이라 서류 부족으로 계속 거부당했다.

 

수틴은 독일군과 프랑스 경찰의 눈을 피해서 싸구려 호텔을 전전했고, 그 사이 독일인 애인도 사라졌다. 위염으로 씹는 음식을 못 먹어서 우유만 먹고 지냈다. 1943년 시골에 피신하고 있다가 위염이 심해 파리의 한 개인병원에서 수술 받고 그 다음날 숨졌다. 그는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묻혔고, 그의 유태인 예술가 친구들은 경찰 감시가 두려워 장례식에도 참석 못했다.

 

프랑스의 미술사는 몽파르나스에서 끝났다. 카페와 피카소의 연애 이야기도 프랑스의 과거를 로망하는 것에 불과하다. ‘Money power’가 꼭 프랑스를 미술종주국에서 밀려나게 한 것만은 아니다.

 

프랑스의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주의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가 프랑스 미술을 몽파르나스에서 끝나게 했다. 그대들의 거만함이 몰락을 자초했다. 이런 상황은 지금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몽마르트르는 여전히 관광객 천지다. 최소한 몽파르나스에는 관광객이 적고 맛집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제 미술의 발자취는 썩은 건물에서도 찾기 힘들다. (중기이코노미 객원=김윤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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