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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따르는 존재 ‘인간’ 예(禮)로 제어할 줄 알아야

이익추구하는 것이 인간 본성이라는 순자의 성악설은 재평가 필요 

기사입력2019-10-19 12:00
문승용 객원 기자 (msy9769@nate.com) 다른기사보기

문승용 박사(중국 문학,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원)
고대 중국의 인문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기원전 5세기 전후로부터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울 때까지를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고 한다. 이때 활약했던 공자(孔子), 맹자(孟子), 노자(老子), 장자(莊子) 등을 여러 선생님들의 온갖 학파라는 뜻에서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부른다. 이들의 호칭에 붙어 있는 아들 자()’자는 선생님이라는 뜻이니, 그들을 각기 공 선생님, 맹 선생님, 노 선생님, 장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싶다.

 

이 시대는 지방의 각 제후국들이 서로 패권을 다퉈 늘 치고받으며 싸우느라, 온 나라 백성들은 물론 이들 선생님들도 평안하지 못했다.

 

유가(儒家) 학파를 연 공자(孔子)는 나이 쉰이 넘어서야 지방국인 노()나라에서 대사구(大司寇)라는 관직을 잠시 지냈지만, 좀 더 큰 정치를 하기 위해서 몇 개월 만에 자리를 내던지고 여기저기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이때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때때로 여비와 식량이 떨어져서 배를 곯으며 다닌 것은 물론 때로는 도적떼를 만나 죽을 고비를 맞기도 했을 만큼 고된 생활을 이어가야만 했다.

 

맹자(孟子)는 자신의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기는 했지만, 많은 제자들을 거느리며 각 나라의 왕들로부터 예우를 받아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당시 어느 왕도, 백성들에게 어진 정치를 펼쳐야 한다는 맹자의 왕도정치(王道政治) 사상을 인정해 그에게 나라의 정치를 맡기지는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말년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을 양성하고 저작활동을 하며 인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공자시대에는 교육을 지배계급의 자제들만 받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공자는 사학(私學)을 열어서 보통 사람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공자가 논어 위령공(衛靈公)’ 편에서 가르침에는 부류가 없다(有敎無類)”라고 한 것을 두고, 신분이 귀하고 천한 것은 물론 부자나 가난한 사람을 가릴 것 없이 원하는 이는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평등교육을 실천한 첫 교육자라고 보기도 한다.

 

공자가 태어난 곡부(曲阜)의 니산(尼山)에는 공자를 기념하는 대규모의 문화관이 세워졌다. 사진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공부하던 강당인데, 공자의 시절에는 이처럼 화려하고 웅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처럼 최근 중국에서는 공자 사상의 부흥을 위해서 공자와 관련한 사업이 대대적으로 진행 중이다.<사진=문승용 박사 제공>

 

공자는 당시 3000명이나 되는 많은 학생들을 가르친 선생님으로서, 만세사표(萬世師表) 또는 지성(至聖)이라 해 오늘날까지 인류의 스승이자 성인(聖人)으로 존중을 받는다.

 

그렇지만 공자가 그 많은 학생들을 그냥 무료로 가르쳐 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논어 술이(述而)’ 편에서 말린 고기 한 묶음 이상을 가져오는 이에게는 내가 일찍이 일깨워 주지 않은 적이 없다(自行束脩以上, 吾未嘗無誨焉)”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자는 자신에게 배우러 오는 학생들에게 수업료로 말린 고기 한 묶음을 받았다고 했다.

 

이것을 두고, 공자가 대중교육을 실시한 이 가운데 아마도 처음으로 학비를 받은 선생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하긴 선생이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직접 생업에 종사할 수 없는 만큼 수업료를 받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라는 공자의 생각을 탓할 수만은 없는 것이겠다.

 

물론 당시 말린 고기 한 묶음이 학생으로서 선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표시한다는 뜻이었겠지만, 3000명이나 되는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드는 비용을 해결하는 것도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맹자(孟子)는 맹자 등문공(滕文公)’ 상편에서 세상에는 대인이 해야 할 일이 있고, 소인이 할 일이 따로 있기 마련인 만큼 정치를 하는 대인(大人)은 농사일까지 할 여력이 없으니, 다스림의 대상이 되는 소인(小人)들은 노력자(勞力者)’로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노심자(勞心者)’인 대인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고 했다.

 

맹자의 논리대로라면, 선생들 역시 정신노동자로서 따로 노동을 해 돈벌이를 할 수 없으니, 학생들로부터 얼마간의 학비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선생도 엄연한 생활인이자 직업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라고 한다면, 크게 잘못된 이해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맹자의 말이 일종의 정신적인 노동자와 육체적인 노동자를 차별하는 의미로도 해석이 돼 논란을 빚는 대목이다.

 

공자를 모신 무덤을 지성림(至聖林)이라고 한다. 지성(至聖)이란 지극히 훌륭한 성인이라는 뜻이고 ‘림(林)’이란 황제의 무덤인 ‘릉(陵)’보다 한 단계 높여서 부르는 호칭인 만큼 공자에 대해 지극한 존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사진=문승용 박사 제공>

 

순자는 말년에 주변에서 모함을 받아 죽을 고비를 맞은 적도 있었지만, 공자나 맹자에 비해서 그의 일생은 비교적 순탄했던 것 같다. 사기(史記) ‘순경(荀卿)열전에는 순자가 제()나라 양왕(襄王) 시절에 최고의 스승으로 존중을 받았고, 대부(大夫)의 지위에도 올랐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순자는 당시 전국 각지에서 모인 학자들이 자유롭게 학문연구 활동을 할 수 있던 연구기관인 직하학궁(稷下學宮)의 최고책임자인 좨주(祭酒)3번이나 지내는 등 학자로서 당대 최고의 지위를 누릴 만큼 인정도 받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순자보다는 맹자를 더욱 존중했다. 그것은 순자가 인간이 타고나면서부터 이익을 좇게 되어 있는 본성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악하게 된다는 성악설을 주장한 것이 공자나 맹자의 성선설에 위배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공자가 논어 헌문(憲問)’ 편에서 이익을 보면 그것이 의로운지 생각한다(見利思義)”라고 한 말에서도 보듯이, 공자 역시 이익이 되는 것을 무조건 물리쳐야 한다고 말한 것은 아닌데, 우리는 과거 전통사회에서 맹자가 성선설을 폈던 것에 찬동해 이익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지나치게 금기시했다. 이러한 전통이 우리가 근대 산업사회로 발전해 나아가는 데에도 걸림돌이 됐던 주요 원인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개인의 이윤 획득을 보장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만큼 순자가 인간이란 이익을 따르는 존재로서 그것을 예()로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던 주장을 곰곰이 다시 새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한국외대 중국연구소 문승용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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