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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철, ‘맹모삼천지교’ 가르침을 돌아본다

맹자, “백성이 귀하고, 왕실은 그 다음이며, 임금의 존재는 가볍다” 

기사입력2019-11-22 11:40
문승용 객원 기자 (msy9769@nate.com) 다른기사보기
문승용 박사(중국 문학,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원)
맹자가 살았던 시기는 공자보다 100여년 뒤라고 맹자 스스로 말했고, 당시 여러 정황을 추론하면 대략 B.C.372년에서 B.C.289년쯤이다. 이런 사실은 맹자의 집안이 당시 그다지 유력하지도 않았고, 그 자신이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실제 맹자는 노(魯)지방의 맹손씨(孟孫氏) 자손으로 가문이 쇠락한 이후 고향을 떠나 추(鄒) 지방으로 옮기다보니, 그의 집안이나 생애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열전에는 맹자가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제자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受業子思之門人)”고 했다. 또 『맹자』 「이루(離婁)」 하편에서 맹자는 “내가 공자의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여러 사람에게서 배워 익혔다.(予未得爲孔子徒也, 予私淑諸人也.)”고 했다. 이를 보면 맹자는 특정한 선생에게서 배우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공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맹자가 유가학파에서 주요 인물이 된 시점은, 맹자가 죽은 이후 1000년가량이 지난 당(唐)나라 때 한유(韓愈)가 맹자를 추존한 이후부터다. 이전까지 유가의 중심인물이 아니었던 맹자를, 한유는 그의 「원도(原道)」라는 글에서 맹자가 공자를 계승한 유학의 도통(道統)이라고 인정했다. 이후 송(宋)나라 주희(朱熹)가 유가의 경전을 사서삼경(四書三經)으로 재편하면서 『맹자』를 그 안에 포함시켰다. 또 원(元)나라 때에는 맹자를 공자 다음가는 성인이라 해 ‘아성(亞聖)’으로 추대했다. 

하남성 추현(鄒縣)의 맹자 사당의 모습이다. 공자의 뒤를 이은 아성(亞聖)이라고 하지만 규모 면에서 공자의 사당보다 훨씬 작다. 아쉽게도 오늘날 참배하러 오는 관람객들도 거의 없다. <사진=문승용 박사 제공>
그렇지만 명(明)나라를 건국한 주원장(朱元璋)은 맹자를 매우 싫어해, 그의 책을 금서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이유는 맹자가 「진심(盡心)」 하편에서 “백성이 귀하고, 왕실은 그 다음이며, 임금의 존재는 가볍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고 해 군주의 지위를 깎아내렸다. 나아가 맹자는 역성(易姓)혁명론을 통해 백성을 괴롭히거나 제대로 먹여 살리지 못하는 자격 없는 왕은 혁명으로 갈아치울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집권자였던 주원장 입장에선 맹자가 반체제인사였던 셈이다. 

그렇지만 한(漢)나라 때 조기(趙岐)는 『맹자제사(孟子題詞)』에서 “맹자는 뛰어난 자질을 타고났으며 그의 자애로운 어머니로부터 세 번 이사 다니는 가르침인 삼천지교를 받았다.(孟子生有淑質, 幼被慈母三迁之教.)”고 했다. 이를 보면 성인으로서 맹자의 자질은 일찍부터 인정받았다고 봐야한다. 여기에 세 번 이사 다닌 가르침이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인데, 이는 『맹자』에 나오는 글귀가 아니다. 한나라 때 유향(劉向)이 여성의 가정교육을 위해 본받을 만한 이야기를 두루 모아 편찬한 『열녀전(列女傳)』에서 나온 말이다.   
  
맹자네가 어디에선가 공동묘지로 이사 했더니, 맹자가 장례식을 흉내 내며 놀길래 시장 근처로 다시 이사를 갔다. 이제는 맹자가 장사하는 놀이에 열심이라서 또다시 서당 근처로 이사했더니, 비로소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이를 두고 뒷날,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 공부를 위해 애쓰는 어머니의 모범이 되었다고 전해졌다. 

이 이야기에는 맹자의 집안 형편을 엿볼 수 있는 실마리가 몇 가지 있다. 기록에는 맹자가 귀족 집안의 자손인 것으로 나온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더라도 집안에 땅이 있었을 것이고, 그곳에서 그냥 세를 받아 편하게 살 수 있었을 터이니, 어린 맹자가 어머니와 함께 이리저리 이사 다닐 필요도 없었다. 

따라서 맹자가 본디 정처 없이 이사 다녀야 하는 평민 출신이었거나 아니면, 그의 선조가 귀족이었더라도 무슨 이유에선지 그이 대에서 몰락했을 가능성이 있다. 생계를 위해 어머니와 단둘이 이사를 다녔던  이유가 설명된다. 

맹자 사당의 전시실이다. 맹자의 정치사상 가운데 핵심인 사랑과 정의 실천을 강조하는 그의 정치사상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사진=문승용 박사 제공>
게다가 첫 번째 이사한 장소가 공동묘지였다는 것은, 좋은 환경으로 이사하지 못할 만큼 형편이 좋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이사한 곳 역시 시장 부근,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서 장사라도 하기 위해 옮겼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식의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서당 근처로 다시 이사를 갔다. 이를 보더라도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단번에 결단을 내릴 줄 아는 용기있는 어머니였음을 알 수 있다. 

맹자와 어머니의 이야기 가운데 ‘짜고 있던 베틀을 끊은 가르침’이라는 뜻을 담은 단기지교(斷機之敎)라는 고사가 있다. 어린 맹자가 공부를 위해 고향을 떠나 멀리 큰 도시로 갔는데, 어머니가 보고 싶었던 맹자는 예정에도 없이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베를 짜던 맹자의 어머니는 냉큼 돌아가 공부를 계속하라고 꾸짖으며 짜고 있던 베의 중간을 끊었고, 맹자는 바로 돌아가 열심히 공부했다는 얘기다.  

그때 베를 끊었던 어머니,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을 수 있다. 그 베를 온전히 다 짜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학비를 마련할 수 있는데, 이를 어쩌나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사랑과 정의를 일깨우는 맹자와 같은 성인이 나온 것은, 남편도 없이 홑몸으로 어렵게 자식을 키워낸 그의 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맹자 이래로 2000여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어머니들 가운데 자식교육을 위하는 마음이 맹자의 어머니보다 못한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대학 입시철을 맞아 여러모로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자식 공부를 위해 애쓰는 부모의 심정을 되새겨 본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한국외대 중국연구소 문승용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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