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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내리는 벌이라 해 교회에서 참회했지만

교회에 모인 감염자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흑사병의 교훈 

기사입력2020-03-17 08:01
문승용 객원 기자 (msy9769@nate.com) 다른기사보기

문승용 박사(중국 문학,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원)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코로나19)가 지난 2월과 3월 초순까지 중국에서 한창 맹위를 떨치더니, 요즘은 유럽에서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바이러스 확진자와 사망자들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바이러스 전염 공포와 중국인에 대한 혐오감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일찍부터 유럽인의 동양사람 혐오감에는 역사적인 유래가 있다.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종교적인 갈등으로 인해서 유럽으로부터 가까운 동쪽지역이라는 의미의 근동(近東, Near East) 지역이나 자신들로부터 훨씬 동쪽인 극동(極東, Far East)의 중간쯤 되는 중동(中東, Middle East)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배척하는 감정의 골이 깊다.

 

이것을 흔히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고 한다. 오리엔트 즉, 동쪽바다 쪽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의식이라는 뜻이니 말뜻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본래 유럽인들이 중세 이래 자신들의 서구문명과 동양의 문명이 어울릴 수 없다고 해, 둘 사이의 문명이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 한때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었다.

 

유럽의 동양인에 대한 공포심이 극도에 달한 때는 13세기 몽골족이 아랍 국가들과 유럽을 침략해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할 즈음이다. 당시 몽골군의 기세는 아시아와 유럽 사람들 모두에게 가히 위협적이었다. 특히 정벌 초반기에는 몽골군의 숫자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정복지를 제대로 관리할 수 없어서 아예 초토화하면서 세력을 넓혀갔다.

 

몽골군은 침략해 가는 곳마다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며 위세를 떨쳤다. 기록에는 몽골군이 점령한 도시에서 수십만에서 백만 명씩 죽이며 이동해 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물론 당시 중세시기에 100만 명이 사는 도시가 있었는지 의문스럽기는 하지만, 여하튼 몽골의 기마병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아시아로부터 유럽의 동부까지 순식간에 점령해 갔다.

 

예전부터 중국에서는 상점이나 노점상 점원들이 위생복을 입고 근무하는 것을 흔히 본다. ‘사람마다 위생에 주의하고, 각각 청결을 소중히 하자(人人讲卫生, 个个爱淸洁)’라는 표어도 흔히 볼 수 있다.<사진제공=문승용 박사>
몽골군이 이처럼 대단한 위세를 떨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목민족인 몽골 군사들이 어린 시절부터 말을 다룰 줄 아는 뛰어난 기마술과 중국이 보유하고 있던 화약무기와 성을 공략할 수 있는 운제(雲梯)와 같은 발달된 무기체계를 전투에서 활용했기 때문에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나라를 단번에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의 유라시아 침략이 세계문명사를 크게 변화시킨 계기는 1347년에 몽골군이 지중해 크림반도에 있는 제노바의 식민도시 페오도시야(Feodosiya)를 공격한 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몽골군의 위세에 눌린 제노바 군이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고만 있자, 몽골군은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과 동물의 사체를 투석기에 실어 성안으로 쏘아 보내는 일종의 생물학전을 시도했다. 그 후 이곳에 있던 제노바의 상인들이 흑사병에 걸친 채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돌아간 다음 유럽에 흑사병이 대대적으로 퍼져나가게 됐다.

 

공교롭게도 이번 코로나19 전염도 유럽에서는 이탈리아가 대대적으로 전파하는 발원지가 됐다. 흑사병으로 말미암아 유럽 인구의 반이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데, 연구마다 당시 사망자 숫자는 들쭉날쭉하지만, 대략 수천만 명은 될 것이라고 한다. 당시 흑사병의 유행은 유럽의 종교와 사회경제 방면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흑사병이 어떻게 감염되는지 몰랐던 당시 유럽사람들은 하느님이 내리는 벌이라고 생각해 교회에 가서 참회했지만, 오히려 그곳에 모인 감염자들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죽었다. 게다가 감염자들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성직자들도 많은 희생을 치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신이 자신들을 지켜 주지 못한다거나 신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며,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또 흑사병으로 인해 인구가 밀집해 있던 도시인구가 줄어 노동력이 감소하자, 농촌에 있던 농노들이 대거 도시로 몰려와 당시 유럽의 경제체제인 장원제(莊園制)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도시에서는 일할 사람이 부족해지면서 인건비가 올라 사람의 힘을 대신할 기계의 발명이 촉진되어 산업사회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가 됐다.

 

조셒 니덤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중국이 근대 산업사회로 발전하기 위한 과학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적 관료들의 유가 이념에 기인한다고 보았다.<사진제공=문승용 박사>

 

이처럼 유럽 전체를 두려움에 빠뜨렸던 흑사병은 중세 유럽사회의 두 근간인 기독교와 봉건제를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고, 이로부터 중세 유럽의 봉건제 사회가 근대 산업사회로 발전해 가는 새로운 역사발전의 단계로 접어들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중국에서의 흑사병 피해와 관련한 기록은 자세하지 않다. 명사(明史) ‘태조본기(太祖本紀)’지정 연간 4(1344)에 비가 내리지 않아 가물고 메뚜기 떼가 날뛰어서 크게 굶주리고 역병이 돌았다. 당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나이가 17살이었는데, 부모와 형제들이 연이어서 죽었지만, 가난해서 장례를 치르지도 못했다.(至正四年旱蝗大饥疫. 太祖时年十七父母兄相繼殁貧不克葬)”고 해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가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이때 크게 유행한 전염병 때문에 죽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것으로 보아 중국에서도 커다란 피해를 입었고, 당시 12000만 명 정도였던 중국 인구 가운데 흑사병으로 약 4000만 명이 죽었다는 연구가 있다. 이것이 계기가 돼 몽골족의 원나라에 반발하는 민중 봉기가 일어나, 결국 몽골족이 쫓겨나고 새로운 왕조인 명나라를 건국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이 급격한 인구 감소로 인해서 인건비가 올라 기계 발명의 필요성이 생기면서 산업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고 했는데, 어째서 중국은 나라가 망하기까지 하는 큰 변동과 전체 인구 가운데 3분의 1이 죽는 급격한 인구 감소가 있었으면서, 유럽처럼 기계의 발명이 촉진돼 근대 산업화에 진입하지 못했던 것일까?

 

조셒 니덤(Joseph Needham)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중국이 근대 산업사회로 발전하기 위한 과학발전을 이룩하지 못한 이유가 중국의 전통적인 봉건적 관료제(feudal bureaucratism)에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중국 관료제를 지탱해 온 사대부의 이념이었던 공자의 유가사상이 중국의 과학발전에 장애가 됐다는 말과도 같다. 과연 유가사상은 중국 근대 산업화에 어떤 작용을 했다는 것일까? (중기이코노미 객원=한국외대 중국연구소 문승용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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