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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인권운동과 콜럼버스 그리고 만리장성

흑인노예의 은으로 유럽은 도자기를 사고 중국은 만리장성을 쌓다 

기사입력2020-06-16 10:00
문승용 객원 기자 (msy9769@nate.com) 다른기사보기

문승용 박사(중국 문학,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원)
미국이 코로나19에다가 인종차별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달 백인 경찰관의 가혹행위로 인해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숨진 사건이 발생하자,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뜻의 흑인 인권운동이 다시금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이 운동이 일어난 초기에는 일부 흑인들이 거리에 몰려다니며 상점을 약탈하는 등 폭력적인 양상을 보이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이제는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서 흑인 인권에 대한 공감대를 점차 넓혀가고 있다. 그런 가운데 새롭게 주목을 받는 역사 인물이, 유럽인으로서 대서양 항해에 처음으로 성공해 아메리카로 갔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다.

 

콜럼버스 시대에는 지구가 네모나다는 인식 때문에 대서양 항해를 하지 못했었는데, 콜럼버스는 도전정신을 발휘해서 용감하게도 대서양 항해에 성공, 아메리카를 처음으로 발견했고, 이로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가 이곳에 식민지를 건설해 국가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최근까지만 해도 그를 평가했다. 게다가 오늘날의 미국이라는 나라가 건국될 수 있었던 것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항해 덕분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는 콜럼버스의 그러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동상들이 여러 지역에 세워져 있다.

 

그런데 새삼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이 한창 벌어지는 요즘, 그의 동상에 페인트를 칠하거나 아예 동상을 끌어내려 강물에 처박는 일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자 그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도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실제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당시 콜럼버스만이 가지고 있었던 신념이 아니라 15세기에 이미 일반적인 상식이었는데, 콜럼버스의 업적을 과장해 그를 영웅시하느라 생긴 오해일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콜럼버스는 새로운 대륙을 찾아 나서기 위한 도전정신을 가지고 대서양을 항해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사람들이 금만큼이나 소중히 여기던 후추를 들여와 큰돈을 벌기 위해서 후추의 주요 산지인 인도로 가고자 했던 것이며, 아메리카를 발견한 것은 그저 우연이었을 뿐이다.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때 만든 은자(銀子)이다. 1545년에 볼리비아 포토시(Potosí)와 다음해 멕시코 사카테카스(Zacatecas)에서 대규모 은광(銀鑛)이 발견된 이래 스페인은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은의 3분의 2가량이 마닐라로 옮겨져 중국상인들이 가져온 비단과 도자기를 사들이는 등 사치품을 소비하는 데에 쓰였다.<사진제공=문승용 박사>

 

그렇다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찾아간 것이 오늘날 흑인 인권운동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콜럼버스는 2차 항해 때부터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잡아다가 유럽에 파는 등 노예사냥을 했다. 그리고 당시 화이트 골드라고 할 만큼 값비싼 설탕의 원료인 사탕수수를 가져가 당시까지 울창했던 쿠바섬의 밀림지역에 불을 질러 대규모 사탕수수 밭을 조성했다. 사탕수수를 키우고 설탕을 정제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했는데, 이때 함께 싣고 간 소나 말, 돼지 같은 가축들이 훗날 천연두나 홍역 같은 전염병을 아메리카에 전파해서 그곳 인구의 90% 이상이 감염돼 죽고 말았다. 그러자 유럽의 상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잡아다가 사탕수수 농장에 노예로 팔았다.

 

흔히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는 미국의 목화농장에서 시작됐다고 알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잡아가 사탕수수 농장에 팔면서 흑인 노예의 잔혹사가 시작됐던 것이다.

 

이때 잡혀간 흑인이 1100만명 정도라고 하는데, 이들은 쇠사슬에 묶여 짐짝처럼 배에 실려 아메리카로 끌려갔다. 고된 항해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사탕수수를 수확하고 정제하는 과정에서 사탕수수 압착기에 팔이 끼이기라도 하면, 기계를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백인 감독관이 흑인의 팔을 그대로 잘라 버렸다고 한다. 이것은 기계를 잠시라도 멈추면 그만큼 손해가 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렇듯 흑인들이 아메리카로 잡혀 와 겪어야 했던 참혹한 노예노동의 역사는 콜럼버스로부터 비롯됐다고 할 수 있는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해 유럽을 근대국가로 발전하게 한 영웅으로 여기던 이제까지의 평가는 지난 수백 년 동안 흑인들이 그들의 조상 때부터 받아야 했던 차별과 고통은 전혀 헤아리지 않은 오로지 유럽 중심의 시각이 아닐 수 없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몽골족을 북방으로 몰아내고 남경(南京)에 수도를 정했지만, 3대 황제 영락제(永樂帝)는 수도를 북경(北京)으로 옮겼다. 그 때문에 국경과 가까이 대치하게 된 몽골족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서 도자기와 비단을 팔아 번 은덩이와 수많은 백성들의 피땀을 쏟아 부어 만리장성을 본격적으로 쌓았다.<사진제공=문승용 박사>
콜럼버스가 죽은 다음 볼리비아 포토시(Potosí)와 멕시코 사카테카스(Zacatecas)에서 대규모 은광(銀鑛)이 발견된 이래 스페인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곳의 은 역시 흑인들의 피땀 어린 희생으로 채굴됐던 것인데, 스페인은 이 은을 약탈해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을 사들여 유럽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기호에 충당했다.

 

그때 도자기를 팔아 큰돈을 벌어들였던 중국의 명나라는 그 많은 돈을 만리장성 쌓은 데에 쏟아 부었다. 왜냐하면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세우면서 북방으로 쫓아낸 몽골족이 언제 또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흔히 만리장성은 진시황제 때 쌓은 것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진시황제 때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했을 뿐이며, 오늘날 남아 있는 만리장성은 대부분 15세기 이래 명나라가 몽골족을 막기 위해서 쌓았던 것이다. 그래서 만리장성을 아메리카에서 갈취해 온 은덩이의 무덤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만리장성에 가면 만리장성에 와보지 않으면 사내대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 非好漢)’라고 쓴 모택동의 기념비를 흔히 볼 수 있다. 높다란 산 구릉에 끝없이 이어진 만리장성의 웅장함을 보면 벽돌 하나하나에 사내대장부의 기운이 스며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태평양 너머 아메리카에서 착취당했던 흑인 노예들의 피땀과 2000여 년 동안 만리장성을 쌓느라 노역에 시달렸던 중국의 보통 백성들을 생각한다면, 만리장성을 그저 웅장한 중화민족의 상징이라고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한국외대 중국연구소 문승용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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