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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현장경험 없이 쌓을 수 없는데…“한계가 있어”

Life is pain.ting #42. 걷는 사람 

기사입력2021-06-12 10:00

뒤늦게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말하는 큐레이터는 현장 경력이 15년이 넘는 이였다. 전시 관련 미팅자리였지만, 편하게 알고 지낸 터라 반갑게 안부도 전하고 식사도 함께 할 요량으로 만난 자리에서 몇몇 공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와중에 그가 불쑥 꺼낸 말이다.

 

크고 작은 전시들을 이어오고, 제법 큰 프로젝트도 적지 않게 진행해 온 그와 몇몇 일들을 하면서, 그가 얼마나 일을 매끄럽게 잘 하는지 보아온 터라 느닷없이 꺼낸 학위 이야기에 당황하며 물었다.

 

한계가 있어.”

 

그가 아무리 현장 경력이 쌓이고, 밀도 있게 일들을 진행해 왔고, 그 덕분에 놓치기 쉬운 디테일들을 섬세하게 챙길 수 있는(현장경험이 없이, 도저히 쌓을 수 없는) 것과는 하등 상관없이 기획자와 큐레이터로서 한계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또 다른 큐레이터가 그의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한계가 있어요. 어느 순간에 현타가 확 오더라니까요.”

 

가만히 들어보니, 기획자로서 어느 정도의 규모를 넘어가기 힘들었고, 현장 경력도 짧고, 딱히 이렇다 할 큐레이팅이 없는 작자들이 화려한 학위와 인맥을 가지고 프로젝트를 따내는 일을 심심찮게 보아오면서 박탈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단 이야기다.

 

기실, 이런 이야기는 매일 식탁에 오르내리는 밑반찬처럼 익숙해서 그 맛조차 보는 것만으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배우면서 경력 쌓았더니, 위에서 뿅 떨어져 안착하는 낙하산 눈치 보며 일하는 직장인 이야기는 드라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1년 넘게 준비한 프로젝트를 위해 몇 달 동안 서류를 준비하고 파이널 면접까지 갔었다는 그녀는 내용이 부실하지만 셀럽을 끌어들인 기획에 밀려 떨어지고 말았다며 피식 웃었다.

 

불공평하다. 문제는 그 불공평과 어떻게 ‘딜’ 하느냐다. 정답은 없지만, 저마다 방법은 다 다르다. 나는 그냥 걷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이미지=이미지투데이>
지금껏 이곳에서 학연·지연을 바탕으로 한 카르텔은 하도 막강해서 소위 어디어디 출신이거나, 누구누구가 만든 판에 들어가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이야기는 말 그대로 수 천 번은 들어온 것 같다. 좋은 작업을 하거나 좋은 기획을 하다 보면 누군가 알아봐 주고 나아지겠지라는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를 포함해서 말이다.

 

실제, 몇 년전에 몇몇 평론가들이 그러한 실태에 대해 쓴 글들을 묶어 출판한 적도 있고, 필자 역시 지인에게 받은 책을 읽어 보기도 했으나, 씁쓸한 현실에 대한 날 선 비판에 등이 시원해지기는커녕 더욱 답답해지는 것이 아닌가.

 

몇 년전 모 레지던시에 입주한 이유는 입주작가를 대상으로 해외 교환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사를 한 달 앞두고 입주작가가 아니라 지역작가로 확장되더니(필자는 지역작가가 아니었다), 면접 당일날 유리창으로 그 지역작가와 심사위원(지역작가의 교수란다)이 포옹을 하고 반갑게 인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내 순서가 왔을 때 들어갔더니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다 어디갔는지.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내내 네 명의 심사위원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자신의 앞에 놓은 페이퍼만 기계적으로 들춰 보다 질문 하나 받지 못하고 나온 적이 있다.

 

예상했듯 결과는 지역작가가 뽑혔고, 다음날 레지던시 학예사로 있던 분이 스튜디오에 들어와 본인이 다 미안하다며 사과를 해 온 적이 있다. 그 때 난 정말로 참담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에 발끈하는 모습이 외려 순진해 보일 지경 아니던가. 당시 몇몇 동료작가들도 조용히 넘어가는 게 좋을 거라는 조언을 하곤 했었다. 그래봐야 까다로운 작가로 찍혀 더 어렵게 되기 십상이라며.

 

불공평하다. 이건 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문제는 그 불공평과 어떻게 하느냐다.

 

정답은 없지만, 저마다 방법은 다 다르다. 누군가는 공동체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적극적인 타협을 하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말 그대로 독고다이길을 가기도 하고. 정답은 없다. 더 나은 방법이라는 건 무엇이 나에게 맞는 방법인가이다.

 

나는 그냥 걷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방향만 정해놓고 그냥 걷기로 작정한 건데 물론 쉽지는 않다. 더러 스며드는 불안감에 짓눌리기도 하는 모양은 요즘같이 변덕스러운 날씨에 갑자기 쏟아지는 비만큼이나 잦을 때도 많다.

 

갑자기 꺼낸 학위 이야기에 그날은 식사 후 늦게까지 술자리가 이어졌고, 와중에 재밌는 아이디어가 쏟아지기도 했으며, 앉은 자세로 부질없이 비장하기도 했으나, 어쩐지 다들 잘 하고 있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학위 이야기를 꺼냈던 기획자는 일주일 후에 하던 대로 쭉 가보기로 했다며 수화기 너머로 다소 명랑한 목소리로 소식을 전해 왔고, 올해 준비할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를 한시간 남짓 들려주었다.

 

참여할 거지?”

그럼

 

그의 프로젝트가 즐겁고 매끄럽게 진행되길 간절히 바랐다.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걷고 있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중기이코노미 객원=김윤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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