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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분서갱유(焚書坑儒)와 주나라 여왕의 폭정

진시황제는 그저 책을 마구 태워버리려 했던 것은 아니다 

기사입력2021-09-03 09:48
문승용 객원 기자 (msy9769@nate.com) 다른기사보기

문승용 박사(중국 문학, 한국외대 중국연구소 연구원)
분서갱유(焚書坑儒)는 글자 뜻대로 풀어보자면, 책을 태웠다는 의미의 분서(焚書)와 유학자(儒學者)들을 파묻어 죽였다는 의미의 갱유(坑儒)를 합해 일컫는 용어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는 중국 역사에서 손꼽는 폭군으로 악명을 날리게 됐다.

 

그렇지만, 분서와 갱유 사건이 기록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진나라 이후에 등장한 왕조인 한()나라 때 쓰여진 역사기록으로서, 될 수 있으면 지난 왕조인 진나라의 정통성을 훼손하고 시황제와 그가 시행한 여러 정책을 나쁘게 평가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시황제가 정신이상 증세였다거나 그저 아무 생각없이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파묻어 죽인 폭군이라고 여길 수만은 없다.

 

분서 사건은 기원전 213년 시황제가 함양궁(咸陽宮)에서 박사(博士) 70명과 벌인 술자리에서 비롯됐다. 유학자인 순우월(淳于越)은 시황제의 정책이 옛사람의 모범을 따르지 않아 앞으로 오랫동안 나라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니 1천년 동안 지속한 주()나라의 봉건제도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진나라 통일왕조의 최고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사(李斯)는 시황제가 통일의 위업을 달성해 만세의 공덕을 세워서 이미 시대가 달라졌는데, 순우월과 같이 어리석은 유생들은 지금의 것은 배우지 않고 옛것에만 매달려 황제의 새로운 정책을 비난하고 백성들을 현혹하고 있다고 했다.

 

비석 뒤에 보이는 야트막한 산처럼 보이는 것이 시황제의 능이다.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를 이루고 문자, 화폐, 도량형 등 많은 통일사업을 펼쳐 중국 역사와 문화에 커다란 자취를 남겼지만, 분서갱유로 말미암아 중국 역사에서 폭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고 있다.<사진제공=문승용 박사>

 

그리고는 이전부터 내려오는 많은 서적이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힐 수 있으니 불태워 버려야 할 것인데, 특히 유가의 시경(詩經)이나 서경(書經) 같은 책을 말하는 자들은 저잣거리에서 사형에 처해 백성들의 본보기로 삼고 옛날 제도를 답습하자면서 진나라의 새로운 제도를 비난하는 자들은 멸족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황제는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다만 의약, 점치는 책, 농업기술 서적 등 실생활에 필요한 분야의 책들은 분서에서 제외했다.

 

시황제와 이사는 진나라가 통일을 이룩하기 이전 수백 년 동안 유가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각 지방의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유세하는 바람에 사상논쟁이 벌어져 세상이 더욱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과거의 정치체제로 돌아가자고 하는 이들의 주장을 금지하는 한편 그들의 책을 불태워 사상통일을 이뤄야 한다고 봤다.

 

그러므로 시황제의 분서갱유는 그저 학자들의 입을 틀어막거나 책이 꼴 보기 싫으니까 마구 태워버리려고 했던 것만은 아니다.

 

특히 시황제는 진나라와 같은 통일제국에는 엄정한 법 체계로 통치를 주장하는 한비자(韓非子)의 법치주의(法治主義)가 필요하다고 여겼는데,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공자의 인() 사상은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겨우 원시생활에서 벗어나 부족 단위로 살아가던 때 있었을 법한 매우 이상적인 사상일 뿐이라며 경계했다.

 

시황제가 죽은 다음 환관 출신 조고(趙高)가 정권을 장악해 2세 황제 호해(胡亥)와 조정을 농단하고, 결국 진나라가 망하게 됐다. 호해의 묘에 있는 후사지사(後事之師)라는 현판은 이러한 일들이 후대의 교훈이 된다는 의미다.<사진제공=문승용 박사>
그리고 분서를 일으킨 다음 해 시황제는 자신을 속였던 방사(方士)들과 법령을 위반한 자들 460명을 처형할 때 시황제의 통일정책을 반대하고 이전 시대의 봉건제로 돌아가자고 했던 유생들도 함께 파묻어 죽였는데, 이것을 갱유라고 한다.

 

그런데 시황제의 분서와 갱유가 안정된 통일시대를 이룩하고자 행한 정책이었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 진나라는 그로부터 10년이 채 되지 않은 기원전 206년 건국한 지 15년 만에 나라가 혼란에 빠져 망하고 말았다. 진나라가 멸망한 것에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기원전 210년 시황제가 죽은 이후 조고(趙高)라는 환관이 권력을 잡아 2세 황제와 조정을 농단했는데 누구도 감히 나서서 바른말을 하는 신하가 없게 됐고, 결국 나라가 혼란에 빠져 망하게 된 것이 일찍이 분서갱유와 같이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하게 했던 사건의 영향도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역시 폭군으로 악명이 높았던 주()나라의 여왕(厲王)은 폭정을 거듭하는 바람에 기원전 841년 중국 역사에서 최초로 민란이 일어나 궁궐을 버리고 달아나는 사건이 벌어졌다. 본디 포악하고 교만했던 여왕을 백성들이 비난하자, 여왕은 이웃 나라에서 무당을 불러와 백성들을 감시하게 하고 자신을 비방하는 이들을 죽였고, 이제 신하들은 여왕에게 조회하러 오지 않았다. 여왕이 백성들을 더욱 엄하게 단속하자 누구도 감히 비방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여왕은 자신을 비방하는 백성들을 모두 처치하니 아무도 자신을 비방하지 않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소공(召公)은 물을 다스리는 자는 수로를 열어서 물이 흐르게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는 그들을 이끌어서 말하게 해야 한다면서, 백성들이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말하도록 하면 왕의 정치가 잘되고 못됨이 다 반영되어 나오는 것인데,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마치 불어나는 봇물을 막는 것과 같아서 보가 터지면 그 피해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여왕은 소공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이후 나라에는 감히 여왕의 포악한 정치에 대해 비난하는 자가 없게 됐다. 3년이 지나자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이 마침내 서로 연합해 난을 일으켰고, 결국 여왕은 궁궐을 버리고 체() 땅으로 도망쳤다가 쓸쓸하게 죽음을 맞아야만 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한국외대 중국연구소 문승용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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