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자 동의 없었다” 임금피크제 도입 무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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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정보 ㅣ 인사노무 “근로자 동의 없었다” 임금피크제 도입 무효 법원,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자발적 의견수렴 보장돼야

기사입력2015-11-24 00:00

박현진 객원 기자 (kpla123@hanmail.net) ㅣ다른기사보기

노무법인 ‘사람과 사람’ 박현진 대표노무사

‘개혁’ 또는 ‘개악’으로 상반된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노동시장 구조 개선안’에는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절차 및 요건을 완화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담겨 있다. 취업규칙의 적용을 받는 당사자,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 없이 정부의 지침 또는 매뉴얼에 근거해 취업규칙을 불이익하게 변경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취업규칙은 사업장 내에서의 근로조건(주로 사용자의 의무) 및 복무규율(주로 근로자의 의무) 등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사용자와 근로자 모두를 구속한다. 사용자와 근로자 각각에 대해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취업규칙은 사업장 내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질서유지 규범(법규범)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런데 정부의 지침에 근거해 사용자 일방이 취업규칙을 바꿀 수 있고, ‘질서’를 깰 수 있다면 법규범으로서의 취업규칙은 그 존재가치 자체가 부정될 수밖에 없다.

취업규칙, 사업장 내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질서유지 규범

일단 정해지면 사용자와 근로자 모두를 강제하기 때문에 취업규칙을 작성하고, 변경하기 위한 요건은 엄격해야만 한다. 이에 근로기준법 제93조는 취업규칙에 담아야 할 내용을 포함, 작성 및 신고절차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또 동법 제94조는 취업규칙 작성 및 변경 시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에는 그 노동조합,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에는 근로자의 과반수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 법률이 국민의 뜻을 수렴해 국회에서 제정 또는 개정되는 것이 원칙이듯 취업규칙 역시 사업장 내 근로자들의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도록 한 것이다. 특히 동법 제94조 단서규정에 따르면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취업규칙을 변경하는 경우 ‘의견수렴’만으로는 부족하고,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도록 변경 요건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이렇듯 엄격한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를 손보고자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임금피크제 도입을 손쉽게 하기 위함이다. 예컨대 취업규칙상 현재 정년이 55세인 사업장의 경우 법정 정년이 60세로 연장됨에 따라 사용자는 정년에 도달한 근로자를 5년간 더 고용해야 할 의무를 부담해야 한다. 사용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임금피크제 도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취업규칙 변경이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정부의 논리가 반은 맞지만 모든 사업장에서 동일한 잣대로 판단할 것도 아니고, 굳이 입법과정을 거치지 않고 무언가에 쫓기듯 추진하는 모양새가 더 안쓰럽다.

아무튼 최근 취업규칙 변경을 통해 임금피크제를 도입했음에도 법원이 취업규칙 변경 과정에서 근로자의 동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무효라고 판단한 사건이 있어 이를 소개한다(서울중앙지법 2015. 8.28. 선고, 2014가합557402).

취업규칙은 사업장 내 노사관계를 규율하는 질서유지 규범적인 성격을 갖는다. 정부의 지침에 근거해 사용자 일방이 취업규칙을 바꿀 수 있고, ‘질서’를 깰 수 있다면 법규범으로서의 취업규칙은 그 존재가치 자체가 부정될 수밖에 없다.<자료=비자트>

주식회사 Z는 3000명 정도의 직원을 고용해 교육서비스업을 영위하는 회사다. 회사의 3개 사업부문 중 하나에는 지역 거점 형태의 교육국이 있고, 교육국은 학습지 위탁교사 관리업무 등을 담당하는 정규직 1명∼5명 정도로 구성돼 있다. 회사는 2009년 5월20일 임금을 순차적으로 60%까지 삭감하는 임금피크제 취업규칙 개정안을 공지했고, 관리자들로 하여금 교육국별로 개정안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 후 행낭을 통해 같은 달 25일까지 본사 인사팀에 도착하도록 했다. 행낭 이송 시간 등을 고려할 때 최대 5일간 의견을 수렴한 결과 총 인원 3331명 중 84.4% 직원의 찬성으로 1차 임금피크제가 도입됐다. 회사는 또 2010년 12월14일 임금을 순차적으로 50%까지 삭감하는 등 취업규칙 개정안을 공지하고, 1차 임금피크제와 동일한 방식으로 3일간에 걸쳐 의견을 수렴했다. 결과 총 직원 중 91.4%가 개정안에 찬성함으로써 2차 임금피크제가 도입됐다.

근로자 주장, 취업규칙 변경 시 사용자 측의 개입·간섭

임금피크제 도입에 대해 세 명의 근로자 A, B, C는 적법한 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취업규칙 변경은 무효라는 주장과 함께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를 제기하고, 무효인 취업규칙에 따른 임금피크제로 삭감된 임금 각 3740만원(A), 3310만원(B), 4010만원(C)을 청구했다.

동의 절차가 위법하다는 근거에 대해 근로자들은 “취업규칙 개정안에 대한 의견을 불과 몇 명이 소속된 교육국 단위로 취합한 결과 사실상 개별 근로자들로부터 의견을 취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게 돼 회의방식에 의한 근로자들의 자발적 의견수렴 절차가 보장되지 못했으며, 의견수렴 과정에서 피고의 지점장 등 관리자들이 동의를 강요하거나 회유하는 등 사용자 측의 개입·간섭이 극심했다”고 주장했다. 근로자들의 주장에 대해 회사는 “취업규칙 개정안 의견수렴 과정에서 교육국 단위에서 충분한 토론과 회의가 있었다”는 반론과 함께 “임금피크제 도입을 포함한 1, 2차 취업규칙은 원고들을 포함한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로 적법하게 개정됐다”고 항변했다.

사용자 반론, 원고 포함 근로자 과반수 동의로 적법 개정

취업규칙 변경을 위한 동의절차 과정 중 자발적인 의견수렴 절차가 보장되지 못했다는 근로자들의 주장은 인용됐다. 법원은 “회의방식을 통해 개정안의 수용여부 등에 대한 자유로운 의견교환이 이뤄질 수 있도록 배려하거나 제반 조치를 강구했다고 볼 만한 정황이 부족하고, 그 결과 1, 2차 취업규칙이 근로자들의 집단적 의사결정방식에 의한 동의하에 변경됐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변경된 취업규칙은 무효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효력이 없는 임금피크제에 의해 삭감된 임금을 근로자들에게 지급하라는 것이다.

법원의 이 같은 판단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에 대한 대법원의 일관된 법리와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취업규칙을 불이익하게 변경하기 위해서는 근로자 집단의 집단적 의사결정방법에 의한 동의가 필요하고, 이때 동의의 방법은 근로자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에는 그 노동조합의, 그와 같은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에는 근로자들의 회의방식에 의한 과반수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대법원 1991. 9. 24. 선고 91다17542).

집단적 의사결정 방법, 자발적 의견수렴 절차가 보장됐는가

이 사건 회사와 같이 근로자들이 전국에 걸쳐 산재하고 있어 일시에 한 장소에서 회의가 어려운 경우 대법원은 “사업 또는 사업장의 기구별 또는 단위 부서별로 사용자 측의 개입이나 간섭이 배제된 상태에서 근로자 상호간에 의견을 교환해 찬반의견을 집약한 후 이를 전체적으로 취합하는 방식도 허용된다(대법원 2003. 11. 14. 선고 2001다18322)”고 본다. 동의 절차 시 요구되는 집단적 의사결정 방법에 대해 대법원은 집단이 함께 하는 회의라는 외관보다는 근로자들의 자발적 의견수렴 절차가 보장됐는가, 그 실질로 판단한다는 것이다.

정규직 직원이 1명~5명인 교육국 단위에서 의견수렴 및 동의절차가 진행됐던 이 사건에서 법원은 “사업조직이 편재된 지역적 특성 등을 고려하더라도 근로자들의 집단적 논의를 사실상 배제하거나 최소화하고, 나아가 해당 절차에 대한 피고(회사) 측의 관여도를 직·간접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고 판단했다. 또 법원은 “관리자인 지점장 등이 극히 소수 단위의 직원들을 직접 대면해 동의서를 교부 및 징구하는 한편, 기명날인된 찬반 의사를 취합해 피고의 인사팀에 보고하는 형식으로 의견취합이 이뤄졌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와 비교할 때 취업규칙 개정안 수용 여부에 관해 근로자들이 찬반 의사를 교환·형성함에 있어 유지돼야 할 집단성·자율성은 상당한 정도로 축소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며 동의절차 과정에서 회사의 부당한 개입 및 간섭이 있었음을 인정했다.

법원, 동의절차 과정에서 회사의 부당한 개입 및 간섭 인정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을 위한 적법한 동의절차의 요건인 자율적인 의견수렴을 위해서는 충분한 토론 및 의견교환을 위한 충분한 시간도 확보돼야 한다는 점도 법원은 지적했다. “사업의 특성상 각 조직이 지역 단위로 편재돼 있으며 소속 근로자들의 수 또한 적지 않은 점을 고려할 때, 3000명에 이르는 근로자들로부터 1, 2차 취업규칙에 대한 동의 여부를 단순히 확인·취합하기 위한 것이라면 몰라도 상호 의견교환이나 토론 등 집단적 논의를 거치도록 보장하기에는 상당히 촉박한 시간만을 부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며 이 사건에서와 같이 1차 및 2차 임금피크제 의견수렴 기간 즉 각각 3일과 5일은 임금피크제의 내용, 제도 도입에 따른 파장 등에 대해 근로자들의 의견 수렴을 위한 기간으로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금피크제 도입을 위해 근로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의견수렴 기간을 보장해야 법원이 납득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숫자로 제시하긴 쉽지 않다. 다만 “취업규칙의 개정을 통해 근로조건이 불이익하게 변경되는 정도가 클수록, 개정되는 내용 자체와 개정 배경 등에 관한 사용자 측의 설명·홍보 또한 그에 비례해 설득력과 합리성을 갖춰야 할 것”이라는 판결문에 따르면 개별 사건에서 구체적인 상황을 고려해 상식과 사회적 통념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