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쌈짓돈으로 사주신 정장, 나눕니다”

프린트

라운지 ㅣ 우린 중기인 “아버지가 쌈짓돈으로 사주신 정장, 나눕니다” 취업준비생에게 옷과 응원메시지 전하는 ‘열린옷장’ 김소령 대표

기사입력2017-01-20 00:00

정장 한 벌 제대로 장만하려면 아무리 못해도 20만원은 필요하다. 백화점에서 브랜드가 알려진 제품을 고르려 하면 40~50만원도 부족하다. 면접을 앞둔 취업준비생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지난해 11월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면접 준비비용만 평균 22만7000원이다. 19만5000원 수준이던 2015년보다 3만2000원이 늘었다. 지출항목으로는 교통비(29%)와 정장 구입비(21%) 비중이 가장 컸다.

이러한 비용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기증받은 정장을 세탁하고 수선해 저렴한 가격으로 빌려주는 비영리기업 ‘열린옷장’이 취업준비생에게 인기다.

정장 공유 비영리기업 ‘열린옷장’ 김소령 공동대표. ©중기이코노미

“취업과 같이 무엇을 시작하려는 때가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잖아요. 그 시기에 자신감과 당당함을 가질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다. 옷 한 벌 빌려주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멋지다’ 그런 당당함을 느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저렴한 대여료 강점…“맞춤 옷 느낌 주고 싶어”

중기이코노미와 만난 열린옷장 김소령 대표의 말이다. 열린옷장은 집집마다 옷장 속에 잠들어있는 정장을 기증받아 꼭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는 ‘공유옷장’이다.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취업준비생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처음 기획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김소령·한만일 대표가 우연한 기회에 만나, ‘활짝 열린 공유옷장을 통해 누구나 당당하게 멋질 권리를 누리도록 응원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2011년 11월부터 본격 사업을 시작했다.

운영원리는 간단하다. 기증의사가 있는 사람이 열린옷장 홈페이지에서 기증신청을 하면, 열린옷장에서 택배로 기증박스를 보낸다. 기증자는 옷에 담긴 이야기와 응원메시지 등을 박스에 동봉된 편지지에 적어 의류와 함께 보내면 된다. 정장을 빌려 입고자 하는 경우는 홈페이지에서 방문시간을 예약하고 열린옷장을 직접 방문, 원하는 옷을 고르면 된다. 사용 후 열린옷장을 다시 찾아 반납하는 방식이다.

열린옷장이 기증받은 1000벌이 넘는 정장. ©중기이코노미

처음에는 10벌의 정장으로 시작했지만, 5년이 지난 지금 1000벌이 넘는 정장을 갖췄다. 하루 평균 적을 때는 70~80명, 많을 때는 120명까지 방문한다고 한다. 취업준비생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이제는 정장을 필요로 하는 남녀노소 모두 이곳을 찾는다. 결혼식을 앞둔 어르신, 발표회나 졸업식을 준비하는 대학생, 오디션을 보려는 배우지망생 등 다양하다.

저렴한 가격이 가장 큰 강점이다. 대여업체로부터 정장 한벌을 빌리려면 보통 10만원 이상 부담해야 한다. 그런데 열린옷장에서는 남성정장 기준으로 3만4000원만 지불하면 셔츠, 자켓, 팬츠, 넥타이 그리고 벨트와 구두까지 모두 3박4일 동안 빌려 쓸수 있다.

품질이 나쁠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옷 기증자에게 ‘기증 가능 체크리스트’를 발송해 사전에 철저한 선별과정을 거친다. 유행이 많이 지난 오래된 스타일의 정장, 오염·손상이 심한 옷, 면접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셔츠 등은 받지 않는다. 특히 기성복의 55, 66과 같은 사이즈 대신 가슴, 윗배, 팔길이, 밑단 등을 꼼꼼히 표기해 맞춤정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을 받은 12명의 ‘옷장지기’가 선택한 정장에 어울리는 넥타이를 맞춰주고, 자체 개발한 프로그램을 통해 성별과 연령 그리고 면접을 보려는 기업명 등을 입력하면 옷을 추천해주기도 한다.

“사실 저나 옷장지기 모두 ‘옷’을 전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간 날때마다 전문가로부터 교육을 받고 있죠. 슈트디자이너로부터 강의를 듣기도 하고, 컬러스타일링 전문가를 초빙해 공부해서 옷을 매칭할 때 활용합니다. 정기적으로 세미나도 열고 있죠. 열린옷장이란 이름처럼 모두가 이용할 수 있도록 옷 사이즈도 10가지 정도로 분류해 놓았습니다. 열린옷장만의 방식을 통해 맞춤정장을 입은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은 것입니다.”

중기이코노미가 지난 17일 방문한 광진구 건대입구역 ‘열린옷장’. 평일 오전인데도 면접을 앞둔 청년구직자들로 붐볐다.(사진 위) 열린옷장은 ‘활짝 열린 공유옷장을 통해 누구나 당당하게 멋질 권리를 누리도록 응원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중기이코노미

기증과 공유의 선순환 ‘공유옷장’…다양한 사회공헌 활동

열린옷장의 수익은 100% 고객이 지불한 대여료다. 저렴한 비용으로 운영되는 만큼 이윤은 거의 없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수익은 대부분 임대료, 인건비, 세탁비 등 실질운영비로 사용한다. 그러나 그중 일부는 다시 사회에 기부하고 있다.

대학생 비영리단체인 ‘십시일밥’에 취약계층 대학생을 위한 식권을 매달 기부하고 있고, 매주 목요일에는 ‘열린 사진관’을 통해 5000원으로 취업준비생의 증명사진을 촬영해주는 서비스도 진행하고 있다. 또 지난해 4월말부터 6개월간 서울일자리플러스센터와 함께 ‘취업날개’ 서비스를 진행해 2000명이 넘는 청년구직자에게 3박4일간 정장을 무료로 대여해 주기도 했다.

김 대표는 열린옷장이 여기까지 오는데 주변 도움이 컸다고 강조했다. 옷장을 꽉 메운 옷이 대표적이다. 월 평균 200벌 정도의 정장을 기증받는다는 게 김대표의 말이다. 전부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옷이다. 임용고시를 볼 때 아버지가 쌈짓돈으로 마련해준 옷, 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되면서 입을 수 없게 된 옷 등등.

옷을 빌린 사람에게는 응원의 메시지도 함께 전달된다. 빌린 옷에는 기증자의 이름이 붙어 있어 기증자가 누군지 알 수 있으며, 열린옷장 홈페이지를 통해 사연도 확인할 수 있다.<자료=열린옷장 홈페이지>

옷을 빌린 사람에게는 응원의 메시지도 함께 전달된다. 빌린 옷에는 기증자의 이름이 붙어 있어 기증자가 누군지 알 수 있으며, 열린옷장 홈페이지를 통해 사연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옷을 빌린 사람도 옷을 반납하면서 면접에 합격했다는 소식, 결혼식에 잘 참석했다는 얘기 등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 때문인지 보증금도 안받고, 본인 확인을 위해 신분증을 복사하지 않아도 대여정장 회수율이 99%에 달한다. 옷을 기증한 사람과 이를 빌려서 입는 사람간 소통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옷 뿐만이 아니다. 옷이 늘어나면서 마땅한 공간이 없자, 남는 사무실 공간을 건넨 손길도 있었다. 같은 건물 4층 사무실 임차인이 그 사무실을 6개월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선뜻 허락해줬다. 또 열린옷장이 소개된 신문을 보고 세탁을 맡아주겠다고 나선 세탁소도 있었다. 경기도 하남의 ‘인수네세탁소’는 열린옷장이 자체적으로 세탁할 수 없는 의류의 세탁을 도와주고 있다.

“사업포기 고민도 있었지만, 고객이 보낸 합격 메시지가 힘”

열린옷장은 올해로 개점 5년차, 아직까진 신생기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증받은 정장은 1000벌 이상, 옷을 빌려간 사람은 3만명에 달할 정도로 폭발적인 호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는데 녹록하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김 대표는 ‘인내의 시간’과 ‘마음가짐’을 강조한다. 열린옷장의 경우 한동안 대표들에게 지급한 급여가 없었다. 버티다 못해 사업포기를 고민하던 중 고객이 보낸 한통의 합격메시지는 김 대표의 마음을 다시금 다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열린옷장을 통해 인생에서 하나의 점을 찍는 분들이 계시는구나. 기증자에겐 유용하지 않은 옷이 이렇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거구나’ 이를 확인하면서 이 사업을 계속 해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습니다.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현실적인 에너지와 마음가짐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김소령 대표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열린옷장’ 이라는 취지에 맞게 온라인 몰을 계획하고 있다. 생각했던 것과 입어본 후가 다른 의류의 특성상 멀리 떨어진 지역의 고객에게는 대여가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시·공간적인 제약을 벗어나 활짝 열린옷장을 위해 온라인으로 대여를 한다는 게 김 대표의 구상이다. 신체사이즈, 어느 기업에서 면접을 보는지 등을 입력하면 옷을 추천해주는 자체개발 프로그램을 활용할 계획이다.

“저희가 꿈꾸는 것은 거창한 게 아닙니다. 누구나 여기와서 가장 멋진 옷을 입고, 삶의 한 부분을 멋진 기억으로 남길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게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 고민하고 한발한발 나아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