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에서 합창하는 봄을 위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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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광장에서 합창하는 봄을 위한 노래 셰퍼드 페어리의 ‘WE THE PEOPLE’과 ‘HOPE’

기사입력2017-04-06 15:17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2008년 ‘HOPE’라는 단어가 미국을 뒤흔들었다. 올해에는 ‘WE THE PEOPLE’이라는 문구가 미국을 뒤흔들고 있다. 2008년 오바마 시대를 눈앞에 두고 미국은 ‘희망’을 노래했지만, 트럼프 시대가 열린 2017년에는 ‘우리가 국민(We the People)’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 노래와 외침을 대변하는 자리에 그가 있다. 그는 거리에서 꿈을 키웠다. 거리는 그의 전시장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의 것이다. 광장은 그의 실험장이며, 그의 의지를 드러내는 공간이다.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은 그의 작품을 들고 자유를, 평등을, 권리를 부르짖고 있다.

벽의 낙서나 하찮은 포스터에 지나지 않았던 그의 작품은 광장의 정치 시대에 사람들의 손에 들려 그들의 목소리가 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광장의 정치 시대에 새로운 예술적 외침이 되고 있다. 광장의 정치로 힘겹게 민주주의의 봄으로 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는 대안적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바로 미국의 길거리 예술가이자, 그래픽 디자이너이며, 활동가인 셰퍼드 페어리(Frank Shepard Fairey)이다.

2017년의 ‘WE THE PEOPLE’과 2008년의 ‘HOPE’

미국은 2008년 이후 가장 뜨거운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올해가 2008년과 다른 점은, 2008년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으로 미국이 희망으로 차올랐다면, 올해는 도널드 트럼프가 45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불안감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점이다. 여러 매체에서 이제 ‘트럼포칼립스’(trumpocalypse, 트럼프와 종말을 뜻하는 apocalypse의 합성어) 시대가 열렸다고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오직 미국’을 외치며 반이민, 반세계화, 반워싱턴정치를 표방하며 등장한 트럼프는 대통령 취임 이후 그가 표방했던 정치를 현실화하고 있다.

그는 미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미국 우선주의’와 ‘신(新)고립주의’를 꺼내들었고, 강경한 반이민 정책으로 백인 우월주의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정책은 세계인을 공분하게 했으며, 미국 국민을 광장에 불러내고 있다.

이 광장에서는 2008년 버락 오바마의 대선 포스터를 제작해 당선에도 기여했던 셰퍼드 페어리의 새로운 포스터가 사람들의 손에 들려있다. 바로 ‘WE THE PEOPLE’이란 문구가 적힌 연작 포스터다. 이 포스터는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에 반대해 이민자(지역), 여성(성별), 흑인(인종)을 주체로 드러낸 작업이다. We the People이 ‘우리가 국민’을 의미하는 것처럼, 이민지역, 성별, 인종에 관계없이 미국에 사는 모든 사람이 국민이라는 뜻이 담겨있다. 이는 트럼프의 정책이 국민을 ‘백인 남성’으로만 생각하는 것에 대한 항의다. 이 포스터들은 광장정치의 상징적 이미지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 포스터를 만든 셰퍼드 페어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2008년 당시 오바마 대선 후보에 대한 개인적인 지지를 표명하기 위해 일명 ‘희망’ 포스터로 알려진 오바마 대선 포스터를 제작하면서부터다.

이 포스터는 오바마의 얼굴을 붉은색과 푸른색의 강렬한 대비로 표현하고, 하단 부분에 ‘HOPE(희망)’라는 글자를 넣어, 유권자들에게 오바마를 강렬한 이미지로 기억하게 했다. 오바마의 당선에도 혁혁한 공헌을 했다. 시사주간 타임지는 2008년 ‘올해의 인물’로 오바마 당선자를 선정하면서 표지에 이 포스터를 사용했고, 페어리는 이를 계기로 국제적인 예술가로 떠올랐다. 그 뿐만 아니라, 이 희망 포스터가 큰 인기를 끌면서 의류와 각종 기념품으로 제작돼 페어리는 40만달러 이상의 이익을 남겼다.

하지만 이 희망 포스터는 AP통신의 사진을 기초로 제작된 것으로, AP통신이 페어리에게 사진 무단 도용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AP통신과 포스터로 벌어들인 수익을 나누기로 합의하는데 이르렀다.

셰퍼드 페어리, 거리의 말썽꾼에서 광장의 활동가로

거리미술에 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되는 셰퍼드 페어리도 오바마의 희망 포스터로 유명해지기 전까지는 일반인에게 사실 거리의 말썽꾼에 지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거리미술이 그렇듯 그도 거리 곳곳을 캔버스 삼아 불법적으로 작품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만든 절제된 표현의 일명 ‘오베이(OBEY)’ 스티커와 거대한 포스터를 도시의 건물 곳곳에 덕지덕지 붙이며 언더그라운드 미술계에 혁명을 일으켰다.(물론 지금도 거리 곳곳에 스티커나 포스터를 붙이고 다닌다.)

그의 거리미술 작업은 1988년 그가 로드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 학생시절에 시작됐다. 그 당시 그는 프랑스의 전설적인 프로레슬러 ‘앙드레 더 자이언트(André the Giant)’ 이미지와 ‘거인에겐 군중이 있다.(THE GIANT HAS A POSSE)’라는 문구를 함께 넣은 초기 형태의 오베이 스티커를 로드아일랜드 주의 도시 곳곳에 붙이기 시작했다. 페어리가 사용한 앙드레 더 자이언트는 덩치가 커지는 거인병을 앓았던 프로레슬러로, 결국 거인병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사망한 인물이다. 페어리는 이후에 이 거인 레슬러의 이미지를 단순화하고, OBEY라는 단어를 함께 넣은 스티커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지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이 스티커를 붙이며 돌아다녔다. 반복적으로 그 이미지를 도시 곳곳에 노출시킨 것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파급력이 강해서 그가 하는 반복적 이미지 노출 방식을 따라 하는 거리미술 작가가 많아졌고, 이제는 그의 ‘오베이’ 작업이 거리미술의 아이콘 중 하나가 됐다. 페어리는 ‘복종하라(OBEY)’는 단어가 들어간 거인 레슬러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노출함으로써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동시에 각자의 주변을 둘러싼 환경에서 개인이 무엇에 ‘복종하는지’ 한번쯤 의문을 가져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거리에서 반복적으로 이미지 노출 작업을 선보였던 페어리는 2008년 버락 오바마의 희망 포스터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최근에 선보인 작업이 바로 ‘위 더 피플’ 운동의 주최인 Amplifier Foundation에서 선보인 ‘우리가 국민(WE THE PEOPLE)’ 연작이다. 그는 이 작품을 명확히 정치적 목적으로 제작했고, 그렇게 사용되길 원했다. 누구든지 Amplifier Foundation 홈페이지에서 다운 받아 출력해 포스터나 피켓으로 만들어 시위에서 활용할 수 있게 했다.(이 홈페이지에는 셰퍼트 페어리 작품 외에도 다른 작가의 작품을 다운받을 수 있다.)

이 페어리의 포스터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다음날인 2017년 1월21일에 있었던 ‘여성 행진(Women’s March)’에서 크게 활용됐다. 이날 있었던 여성 행진은 미국 워싱턴 D.C.를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서 진행됐는데, 미국에서만 290만명에서 420만명이라는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 이 행진에서는 여성 인권뿐만 아니라, 성소수자 인권 증진, 이민자 정책 개혁, 인종 차별·노동·환경 문제 해결 등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트럼프 정책을 규탄했던 이 행진에서 페어리의 ‘우리가 국민’ 포스터는 곳곳에 등장해 집회 참가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어떻게 보면, 페어리는 자신의 주요 작업인 오베이(obey)를 기반으로 작은 의류회사인 ‘OBEY’ 브랜드를 운영하는 면모를 보이는 상업적인 작가다. 또한 자신의 현장 활동을 상업적으로도 연결하는 능력이 탁월해 보인다. 오바마의 희망 포스터가 수익으로 환원됐던 값진 경험이 주요했던 것 같다. 현재도 그의 ‘우리가 국민’ 포스터는 집회 현장 곳곳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엽서나 소품, 한정판 석판화 작품 등으로 또 다른 형태의 상업적인 작품으로 변환돼 판매되고 있다.(판매 수익이 집회의 운용자금으로 사용되는지, 아니면 개인 수익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를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분명 그의 이미지는 미국인이 하고 싶은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고,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도 생활인으로서 수익이 있어야 한다. 현실 참여적이면서도 수익형 구조를 만들어내는 그의 활동은 어떤 측면에서 대안적 예술가의 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글=안진국 미술평론가, 종합인문주의 정치비평지 ‘말과활’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