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도시들 그리고 익명의 초상

프린트

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보이지 않는 도시들 그리고 익명의 초상 [그림을 읽다:Blue-chip Artist] ② 이민호 작가

기사입력2013-12-01 18:07

(주)예술만세 기자 (artmanse21@naver.com) ㅣ다른기사보기

Strange Site #2

보이지 않는 도시들

드라마 세트장을 가본 적이 있다. 한 공간에서 여러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가변 벽들이 여기저기 놓여있고 그 사이로 많은 소품들이 그 곳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모습으로 놓여 있었다. 자기의 장소를 찾지 못한 물건들의 모습에서 이 사회에서 정체성을 갖지 못해 이리저리 떠도는 소외된 사람들의 초라한 현실을 보는 듯 했다.

드라마란 현실세계와 상상의 세계를 조합해 놓은 또 다른 세계라고 생각한다. 보여주고 싶은 것/곳과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들이 공존하는 곳, 또 한 순간의 꿈과 같이 사라져 버리는 곳이 드라마 세트장이다. 여기저기 뚫린 공간으로 다른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곳. 과거와 현재가, 기억과 기억이 연결되는 일상과 그곳으로부터의 일탈이 연결되는 곳이 이 곳이다. 친숙하고 익숙한 대상에 대해 객관적 거리감을 갖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새로운 의미 관계를 만들어 대상을 새로운 원근법 속에 집어넣어 주변을 환기시키는 형태의 구조로 된 그런 공간/장소를 얘기하려 한다.

브레히트가 주장한 대로 일반적인 것에 낯설게 보기를 강요함으로써, 익숙한 것의 관념의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일반성 자체를 부정해 버림으로써, 일반성을 강조하려 한다. 재조합된 사물들과 공간들이 현실의 재현일 뿐, 현실 그 자체는 아니라는 내용을 수동적인 수용보다는 비판적이며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지켜본 작업이다.

공간의 확장이 시간성과 연결이 되어서 과거의 공간과 연결되며 사회와 개인의 역사성의 확장을 함께 공유하려 한다. 이 작업에서 보이는 공간/장소들은 익명의 즉 이름을 갖지 못한 공간이다.

수명을 다해 폐쇄됐거나 일련의 사건들에 의해 준공허가가 나지 않아 잠정적으로 버려졌거나, 아니면 아직 건축 중에 있는 공간들이다. 작업에 나타난 대부분의 공간/장소들은 이 시대가 갖고 있는 사회적 문제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Strange Site #16

하지만 이 시리즈 작업뿐 아니라 내 작업 전체를 통해서 얘기하려 한 정체성/익명성에 대한 주제에 반하지 않게 장소성을 얘기하면서 다른 개념으로 확장되는 것을 지양하기에 모든 작업의 제목을 일련의 번호로 명명했다. 정착된 삶보다 유목민적인 삶이 또 가상현실의 삶이 빠른 속도로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 이 시대의 공간 풍경.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이, 어느 순간 어둠에 몸을 숨기고 틈을 노리다 일상생활 내부의 부조리가 비밀과 기괴함으로 무장된 초현실적인 불안하고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는 모습과 주위의 버려진 익명의 도시 공간들의 충돌을 그려 보려 했다.

“디지털 사진은 현실의 시간 안에 있다. 디지털 작업으로 이루어진 이 작업들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 부재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무언가를 증명한다”라고 보드리야르가 이야기 했듯이….

익명의 초상

내 회화는 구상성과 추상성의 경계에 서 있다. 알 수 없는 어떤 커다란 덩어리 혹은 액체와 같이 흐르는 듯한 모습이다. 그런 비정형성이 어느 정도의 거리를 가지면서 형태를 드러내게 된다.

n.18 Anonymous Portrait_회색 낱말 2

얼굴의 한 부분을 클로즈업해서 그린 작업에서 보여지는 코끝이나 입술의 한 부분은 거리를 두지 않고 가까이에서 마주하면 형상을 가늠할 수가 없다. 거리를 두어야만 알게 되는 이 현상을 나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에 필요한 거리라고 부른다.

작업의 과정은 먼저 일반적인 잡지에서 사람들의 얼굴 사진(그 속에는 유명인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일반인들도 있다)을 선택한다. 그 사진들을 오려내서 여러 번에 걸쳐 접어간다. 그러면서 얼굴의 전체 형태는 사라지고 알 수 없는 비정형의 한 부분만이 남는다. 그 부분을 큰 화폭으로 옮겨 그린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얼굴사진으로 증명된 사람들의 모습을 덩어리, 즉 비정형으로 만들어 익명화시키는 것이다. 일종의 인간들의 사회적 지위를 박탈해 나가는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누구인지를 증명을 하거나, 알아보게 해서 사회적인 분류에 의한 정체성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초상화의 기본이다. 나의 익명의 초상들을 작업하면서 표현하려 한 것은 그런 일반적인 초상화의 개념에서 얘기하는 사회적 분류에서 추락한 사람들의 모습을 얘기하려 했다. 조르쥬 바타이유가 그의 저서 ‘Document’에서 “비정형은 Déclassement(즉 어떤 사회적인 위치에서 추락한 것)이다”라고 얘기 했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