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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미술서 볼 수 없는 기법…단색화 중심에 서다

반복적 긋기를 지속하는 수행자 같은 손…박서보의 수행기(手行記) 

기사입력2019-06-08 12:00
김태현 미술평론가 (elizabeth0711@gmail.com) 다른기사보기

케이팝이 세계에서 주목받는 음악장르가 됐다면, ‘단색화라는 한국미술의 한 장르는 마치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사조와 같이 됐다. 한국의 1970~80년대를 이끌었던 미술사조인 단색화는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1960년대 서구의 미술사조가 급격히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한국 미술계는 여러 가지 지각 변동의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한국 고유의 미감을 연구한 단색화라는 장르가 탄생했다.

 

‘묘법(描法) No.011107’, 2001, 캔버스, 한지에 혼합재료, 225×30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 탄생의 과정에는 한국에서 젊은 미술가들과 반국전 운동을 주도했던 박서보와 일본을 오가며 활동한 이우환이 그 중심에 있다. 이들 중 한국에서 미술활동을 해온 박서보는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한국 미술계에 큰 기여를 한 미술가다.

 

한국 현대미술의 대부=홍익대학교 2회 입학생인 박서보는 대학 재학 중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한국전쟁 당시 홍익대학교는 부산으로 학사를 이전해 잠시 수업을 하다 전쟁 후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는 전쟁과 함께 부친이 병사를 겪으며 실존에 대한 문제를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존 세대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게 됐다.

 

전쟁이 끝나고 박서보가 졸업했을 당시 화가로 등단하기 위한 대한민국 미술 전람회’, 소위 말하는 국전이라는 미술대회가 있었다. 국전은 기성세력들이 강력하게 주도하고 있었다. 또한 수상작품의 경향 역시 일본 화풍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소위 말해 국전 스타일의 획일화된 작품들이 주를 이뤘다.

 

박서보는 젊은 미술가들과 더불어 국전에 도전장을 내걸고 1957년 현대미술가 협회를 창립했다. 현대미협은 박서보 이외에도 김창열, 장성순, 김서봉, 이철 등이 함께 활동했다. 당시 전후 세계 미술계의 주요 무대는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옮겨가는 시점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감지하고 프랑스 미술계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젊은 미술가들을 프랑스 화단으로 불러오는 파리비엔날레를 개최했다. 19591회전이 개최됐는데 35세 이하의 미술가들만이 참가 가능했으며, 다양성을 추구하는 전시였다. 한국으로도 파리비엔날레의 초청이 갔으나 정부의 무관심으로 참석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원형질 No.1-62’, 1962, 혼합재료, 161×13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박서보는 1961년 유네스코 산하 국제청년작가회의에 30세 이하 미술가로 추천을 받아 프랑스에 갔다. 그러나 회의가 11개월 뒤로 늦춰진 상황이었고, 이를 바로 통보받지 못해 일찍 도착한 것이었다. 박서보는 유네스코 측에 항의해 11개월간 체류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으며, 체류 중 파리비엔날레에 대하여 알게 됐다.

 

당시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었던 이일과 박서보는 한국의 참가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고, 한국에서 함께 현대미협에서 활동하는 김창열의 조력으로 19612회 파리비엔날레부터는 한국의 참가가 가능하게 됐다. 이후 현대미협은 파리비엔날레의 심사 전권을 차지하게 됐으며, 그 밖의 다른 국제전시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한국의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은 박서보의 시선을 세계 미술계로 향하게 했으며, 그 열정으로 미술 행정가로서도 다양한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역할이 향후 그의 미술세계와 한국 미술계를 구축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원형질에서 묘법까지=박서보의 작품이 처음으로 대중들에게 알려지면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작품 중 하나는 원형질 시리즈의 ‘NO.1-62’ 이다. 원형질 시리즈는 어두운 배경에 엑스레이에 투과된 뼈 형상과 두터운 질감이 인상적이다. 이 작품은 19633회 파리비엔날레에 출품돼 살아있는 미술의 함성이라는 전후 세대의 미술가들을 다룬 글에 다른 작품과 함께 보도돼 눈길을 끌었다. 이후 1960년대 후반부터 약 10년간 실존에 대한 문제와 화려한 색감이 대비되는 작품인 유전질 시리즈를 제작했다.

 

같은 기간 단색화 흐름을 이끌었던, 흰색이 캔버스 전면에 드러나는 추상작품인 묘법을 시작한다. 박서보는 처음 이러한 기법을 사용하게 된 계기로 아들이 공책에 맞춰 글씨 쓰는 연습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영감을 얻었다고 술회한다.

 

‘묘법(描法) Écriture No.071021’, Mixed Media with Korean hanji paper on Canvas, 2007, 195×13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초기 묘법은 흰색 유화물감을 캔버스 전면에 바르고 채 마르기 전, 연필로 선을 그어나가며 손의 힘에 밀려나가는 물감과 흑연이 여러 층을 이루는 작품이다. 초기 묘법은 아그네스 마틴이나 사이 톰블리의 작품과 비교되기도 하나 실제로 작품을 마주하면 그 느낌은 매우 다르다. 박서보의 묘법은 보다 손의 흔적, 수행성이 강조돼 있으며 손이 지나간 흔적의 질감으로 인해 한국 도자기의 문양이 연상되기도 한다.

 

후기 묘법 작품은 한지의 특성을 활용한 작품이다. 한지, 혹은 닥지는 서양의 종이와는 다르게 물감을 흡수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종이의 두께감과 변형이 자유롭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박서보는 한지의 특징을 살려 붓에서 나아가 손가락의 압력을 이용해 캔버스에 손의 흔적에 따라 변화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또한 물감이 한지에 완전히 흡수되어 깊고 강렬한 색조를 보이고 있다. 전기 묘법과 마찬가지로 한 번에 손가락의 흔적이 남는 것이 아닌 여러 번의 손길을 거쳐야 작품이 완성되는, 수행성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수행자와 같은 손=사람은 누구나 두 개의 손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삶에 있어서 그 쓰임새는 모두 다르다. 박서보의 손은 마치 반복적인 긋기를 지속하는 수행자와 같은 손을 가진 듯하다. 그의 손이 여러번 거친 다양한 작품들은 대중들에게 예술적인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박서보는 혼란기의 한국 미술계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대응하며 현대 미술계의 지형을 만들었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며 새로운 미술을 선보여 왔다. 그의 미술은 서구 미술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재료와 기법으로 무위의 정신성을 강조하며 단색화의 중심에 서있다. 살아 있는 한국미술의 전설과 같은 그의 작품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대규모의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박서보의 수십년간 물감과 종이를 거친 손의 기록을 직접 관람하며 그의 미술세계를 살펴보길 바란다. (중기이코노미 객원=김태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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