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듐이 만병통치약이던 시절…그녀는 시력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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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라듐이 만병통치약이던 시절…그녀는 시력을 잃다 유일한 인상주의 미국인 여성화가의 열정과 절망…메리 카사트

기사입력2021-09-17 15:39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화가에게 눈은 생명과도 같다. 보지 못하면 그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眼)질환은 화가에게 치명적이다. 간혹 안질환이 명작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모딜리아니와 렘브란트, 드가, 고흐 등을 들 수 있다.

우아한 긴 목선과 긴 코로 애수에 젖은 듯한 여인을 그린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는 심한 난시(亂視)를 앓았고, 그 때문에 일반 사람과는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며 그만의 독특한 인물을 그릴 수 있었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는 백내장 때문에 갈색과 옅은 노란 색조의 작품을 남기게 됐다고 추측한다.

드가(Edgar Degas)는 사물이 구부러져 보이는 황반변성 때문에 지금 우리가 파격적인 화면 구성이라고 평가하는 작품을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고흐(Vincent van Gogh)는 눈앞이 소용돌이로 아른거리게 된다는 색소성 망막염을 앓아서 그의 독특한 화풍이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있으며, 그가 노란색을 유독 많이 쓴 것은 압생트라는 독한 술을 즐기면서 사물들이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黃視症) 걸렸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사례는 소수다. 그리고 이들도 삶에서 안질환 때문에 심한 고통을 겪으며 작업을 했다. 적지 않은 작가들이 시력을 잃고 결국 작업을 멈췄다. 1870년대 파리에서 인상주의 운동을 함께 했던 메리 사트(Mary Stevenson Cassatt, 1844~1926)도 백내장으로 결국 손에서 붓을 놓았다. 이번에는 메리 카사트의 삶을 따라가 보려 한다.

미국인 여성화가, 프랑스의 인상주의 바람 속을 걷다

19세기 산업혁명 시대에 생산된 튜브형 물감은 새로운 미술을 탄생시키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야외에서 간략하게 스케치해 온 풍경을 작업실에서 그리던 작가들이 튜브형 물감을 가지고 야외로 나가 눈부신 햇살 아래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야외에서 본 세상은 강렬했고, 화가들은 그 느낌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과감한 붓터치와 강렬한 원색을 사용했다. 전통적인 미술 양식을 거부하는 새로운 작풍이 이런 움직임 속에서 만들어졌다. 사실과는 동떨어진 ‘인상’만을 그린다고 조롱했던 말은 그들을 부르는 자랑스러운 호칭이 되었고, 그렇게 ‘인상주의’는 탄생했다.

‘아침 신문을 읽는 리디아(Lydia Reading the Morning Paper)’, 1878~1879, 캔버스 위에 유채, 32×23 1/2inches.

‘인상주의’는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그 바람이 일었다. 이 바람 속에는 미국인 작가도 있었다. 유일한 미국인, 그것도 여성작가다. 메리 카사트. 그는 (현재 미국 피츠버그라 불리는) 펜실베니아 알레게니 시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여성으로, 1866년 20대 초반에 화가의 꿈을 찾아 파리에 왔다.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열렬한 팬이기도 했던 그는 ‘살롱’ 전시에 출품했던 그림이 모두 거절당한 불운한 1877년에 드가의 초대로 인상주의 작가들과 함께 전시할 수 있었으며, 인상주의 작가들 사이에서 느낀 편안함과 친근함, 열광적인 창작의지에 매료되어 그들의 일원이 되었다.

그의 화가를 향한 열정은 실로 놀라웠다.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화가가 되겠다고 15살 때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니아 미술학원에서 공부했고, 20대 초반 파리로 이사까지 했다. 하지만 장벽은 높았다. 펜실베니아 미술학원은 그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교육 방식이 좋지 않았고, 화가가 되기 위해 건너온 파리에서는 미술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에 입학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여성을 학생으로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에콜 데 보자르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화가들에게 개인교습을 받을 정도로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 결국 1868년 심사위원에게 인정받아 처음으로 파리 ‘살롱’에서 전시했고, 이후 10여 년간 여러 좌절을 겪으면서도 ‘살롱’ 전시를 이어갔다.

사실 그 당시 여성화가는 심사위원 중 친구나 친척이 있지 않으면 무시당하거나 부당한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어떤 여성화가들은 작품보다 자신의 여성적 매력을 어필하곤 했다. 하지만 카사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이런 면에서는 단호했다. 이런 단호함 때문에 1877년 ‘살롱’에 출품한 모든 작품이 거절당했다. 7년간 이어졌던 ‘살롱’ 전시가 멈춘 것이다. 불운이었다. 하지만 이 일로 인상주의 작가들과 함께 전시할 수 있는 행운이 찾아왔다.

‘살롱’ 출품에 단호함은 있었지만, 카사트는 여성을 무시하던 당시 사회에 대항하는 투쟁적인 그림을 그린 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중에는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는 지적인 현대 여성이 자주 등장한다. 여성화가로서 ‘살롱’ 출품에 당당함을 보이고, 지적인 현대 여성을 그린 것은 어쩌면 여성을 무시하는 당시 사회를 향해 외치는 은근한 항의의 목소리였는지도 모른다.

미술에 대한 기여와 명성 인정 받았지만…시력을 잃다

백내장이 심해지면서 화풍이 거칠어졌다. 메리 카사트,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Mother Holding Her Baby)’, 1914, 종이 위에 파스텔, 76×64cm.

1904년 메리 카사트는 프랑스의 레지옹 훈장(Légion d'honneur)을 받았다. 그가 보여준 미술에 대한 기여와 명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의 작품활동은 1890년대부터 1910년대 초까지 가장 화려하게 빛났다. 하지만 1910년부터 몸에 이상이 생기더니, 1911년 당뇨와 류머티즘, 신경통이 발병했고, 1912년부터 눈에 이상이 생겼다. 백내장이 찾아온 것이다. 그로 인해 시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그림의 정교함이 사라지고 화풍이 거칠어졌다.

당시 함께 교류하던 드가나 모네도 안질환을 앓았다. 하지만 그들은 작품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백내장으로 실명 직전까지 갔던 모네는 두 번의 수술 후 (오른쪽 눈의 시력은 완전히 잃었지만) 신문을 읽고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시력을 회복했고, 그림도 계속 그릴 수 있었다.

드가는 삼십 대부터 황반변성으로 시력을 점차 잃어가면서 유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힘들어지자, 파스텔화에 전념했으며, 조각 작품도 제작하면서 작품세계를 이어갔다. 반면에 메리 카사트는 백내장이 심해지자 1915년부터 작품활동을 완전히 멈췄다. 백내장 수술을 받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1917년 오른쪽 눈 수술을 받았으나 경과가 좋지 않았고, 1918년에는 왼쪽 눈마저 백내장이 생겨 수술을 받았지만 시력이 회복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에게 안질환이 발병한 이유는 뭘까? 드가, 모네, 고흐 등 인상주의 화가에게 안질환이 자주 나타났는데, 혹시 눈부신 야외에서 작업을 자주 해서 눈에 장애가 온 걸까? 그 당시 유화물감을 만들 때 유해물질이 사용되었는데, 물감의 독성 때문에 눈에 병이 생긴 걸까? 당시 정확하지 않은 진단과 처방이 만연했었는데, 그 때문일까?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유력한 후보가 있다. 바로 당시 유행했던 민간요법 라듐(Radium). 그 당시는 마리 퀴리(Marie Curie)가 발견한 방사성 물질 ‘라듐’이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쓰였다. 소량만 추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색채도 신비로웠고, 비정상 세포를 파괴하는 현상을 발견한 탓에 라듐은 민간에서 만병통치약으로 통용됐다. 라듐 초콜릿, 라듐 치약, 라듐 음료수, 라듐 옷이 유행처럼 팔려 나갔다.

라듐으로 백내장을 치료할 수 있다는 논문까지 발표될 정도였다. 라듐 흡입 치료가 민간에서 암암리 시행됐다. 잘 알려졌다시피 마리 퀴리는 자신이 발견한 라듐 때문에 백내장과 급성 빈혈에 시달렸다. 메리 카사트도 백내장과 당뇨병 치료를 위해 그 당시 유행하던 라듐 치료를 받았다. 이 치료는 그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약해진 신체는 정신을 무너뜨렸고, 그의 예술을 사그라들게 했다. 메리 카사트는 말년에 시력을 잃은 상태에서 외로움과 우울증,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당뇨 합병증으로 1926년 6월14일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