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류와 타협하지 않고, 韓日 조각계에 큰 획 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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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시류와 타협하지 않고, 韓日 조각계에 큰 획 긋다 영원을 꿈꾸는 조각가…권진규의 미술

기사입력2021-10-14 12:26

김태현 미술평론가 (elizabeth0711@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권진규는 192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20대에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일본으로 징용되었지만, 도망쳐서 숨어 지내던 중에 해방을 맞이했다. 해방 이후 이쾌대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1948년에는 일본에서 공부하던 형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밀항해 결국 무사시노 미술대학교에서 조각과를 졸업했다.

◇한국 조각계의 획=그는 음악 애호가였으며, 음감을 양감으로 표현하고 싶어 조각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의 스승은 시미즈 다카시로 앙투안 부르델에게 수학한 사람이다. 부르델 역시 음악 애호가로 권진규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권진규는 일본 이과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하고 화단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던 1959년,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귀국한 후 본격적으로 조각가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당시 척박한 한국의 미술계에서 조각이라는 분야 역시 쉬운 것은 아니었기에 그의 정착 역시 많은 난관이 있었다.

1965년 신문회관에서 한국 최초의 조각가 개인전을 선보였으나, 많은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을 향한 그의 열정은 지속됐다. 일본의 니혼바시 화랑에서 개인전 제의가 들어와 1968년 테라코타 30점을 선보였고, 이 전시는 요미우리 신문과 도쿄 신문에 소개되며 주목을 끌었다. 이때 권진규는 다시 도일을 시도했으나 좌절됐다.

권진규, 도모, 1951, 석고, 25×17×23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이후 한국에서 1971년 명동 화랑과 전시계약을 맺고 개관 1주년 전시를 진행했다. 당시 명동화랑에서 그의 전시를 본 고려대학교 박물관 학예사가 작품 구입을 추진해, 권진규는 본인이 가장 아끼는 작품 2점을 고려대학교로 보냈다. 하지만 고려대학교 박물관 현대미술실 개관식 다음날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음감의 양감화를 시도하다=권진규는 테라코타와 건칠 조각을 주요 재료로 활용했다. 건칠은 옻을 활용해 표면을 매끈하게 하는 기법으로 제기나 불상 등에 활용됐다. 그러나 권진규가 수학하던 시절, 일본의 군 물자 조달로 금속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건칠 조각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대포의 표면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일본에서 중국산 옻을 대량 수입한 덕에 일본에서는 재료를 구하기도 용이했다.

권진규는 자신의 건칠을 기존 공예품을 제작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법으로 제작했다. 표면을 거칠게 표현하기 위해 기와 가루를 섞어 사용했으며, 삼베를 활용해 질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권진규는 건칠은 가볍고 형태 변형이 적기에 기법이나 공정이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그만의 기법을 개발해 창작활동을 했다(김이순, ‘존재의 내면 표현을 위한 실험과 모색:권진규의 건칠조각’, 미술사 연구, 2018.12, 218~229p).

건칠과 더불어 주로 활용한 테라코타의 경우, 건칠 조각과 마찬가지로 흙의 텁텁한 손맛이 잘 살아난다. 권진규는 테라코타로 인물의 두상을 다수 제작했는데, 두상의 형상은 전반적으로 길게 다듬어져 있다. 그리고 어깨의 형태를 둥글게 아래로 깎아내렸으며 두 눈은 먼 곳,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어 마치 현 세상을 초월한 인간처럼 보인다. 또한 얼굴의 생김새 역시 주변의 흔한 사람들의 모습이나 표정이 아니라 잘 다듬어진, 그의 이상향을 표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작품 속 인간의 두상에서는 숭고미와 같은 심상이 들곤 하는데, 그리스 조각에서 느껴지는 이상적인 인간, 혹은 인간의 모습을 닮은 신과는 다른 느낌이다.

권진규의 조각은 선적인 면이 부각되어 있다는 점에서 자코메티의 조각을 연상케도 한다. 양감을 강조해 두께감을 주는 것보다 작품의 형태에서 선을 강렬하고 힘이 느껴지도록 활용한 것이다. 또한 그의 재료를 다루는 손의 흔적들은 작품에서 묘한 생명력을 느끼게 해준다. 더불어 인물들은 무표정하지만 먼 곳을 바라보는 진지한 시선과 입매로 강렬한 인상을 준다.

권진규, 마두, 1953, 석조(안산암), 30×70×18cm,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그가 자주 표현한 동물 중 하나인 말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작가들이 제작한 말 조각이나 그림에서는 강렬한 근육이 강조되는 경향이 있는데 권진규는 단순하게 표현하지만 넘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절제된 표현은 묘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권진규처럼 심지가 굳은 예술가에게 ‘만약에’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여러 가지 상상을 해 본다면, 그의 위상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권진규가 활동하던 당시 한국에서는 헨리 무어 등의 영향으로 추상 조각이 주를 이루었다. 대부분의 조각가들이 간결한 조형을 표현하려고 노력했고, 작품의 주제 역시 조화와 율동 등을 표현하는 추상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권진규는 그러한 시류에 타협하지 않고 그만의 구상 조각을 개척해 나갔다. 또한 작품의 재료 역시 남들과 다른 소재로 지속적인 실험을 거듭하며 발전해나갔다. 그는 쉽게 변하지 않는 재료로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재료의 개발을 거듭했다.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 중 테라코타로 만든 부장품들은 세월이 흘러도 그 형태가 유지되는 것에 착안해 테라코타를 작품의 재료로 즐겨 활용했으며, 건칠 역시 제작할 때의 어려움은 있지만 그 형태가 영구히 보존될 가능성이 높은 재료여서 자주 사용하곤 했다.

영원을 꿈꾸었던 그의 신념과 이상을 향한 굳은 의지가 비록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조각계에 큰 획을 그을 수 있었던 힘이기도 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김태현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