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부러웠지만 “예술은 없고 예술교육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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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열정 부러웠지만 “예술은 없고 예술교육만 있네” Life is pain.ting #59. 독일 카셀 도큐멘타 투어

기사입력2022-11-10 09:09

김윤아 작가 (bombbi0401@naver.com) ㅣ다른기사보기

11월 개인전 준비는 아직 마무리 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전히 작업들을 어떻게 추려내고 연출할지에 대한 생각은 정리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시간 간격으로 머릿속의 생각들은 태산을 쌓았다가 무너지기를 반복했고, 딱히 건질만한 것들은 없었다. 여기저기 수첩에 그때그때 떠오르는 반짝이는 생각들을 적어놓긴 했지만 하루도 지나기 전에 빛을 잃었다. 그 즈음 한 달 정도를 국외에서 보낼 수 있는 일이 생겼고, 그대로 간단히 짐을 챙겨서 나왔다.

아직 카셀 도큐멘타(독일의 소도시 카셀에서 5년에 한 번 열리는 대규모 현대미술 전시)도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고, 베를린 아트 위크(Berlin Art week)와 베를린 아트페어도 오픈을 앞두고 있었다. 여기저기 천천히 걷고 보고 하다보면 생각도 좀 느려지고, 바보 같아지고, 그러다 보면 수면 아래로 모든 것들이 가라앉고 정작 남겨야 하는 중요한 것들만 둥둥 수면 위에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면 나는 그 남겨진 것들만 호로록 거두어들인 후 그에 알맞은 요리만 하면 될 일이다.

해외 이동이 코로나 시국 이후 처음으로 느슨해져서인지 비행기 값은 말도 안되게 치솟아 있었고, 숙소 비용도 만만치 않다. 가장 저렴한 항공사를 선택하니 두 번의 경유지가 있고 비행시간은 터무니없이 길다. 지난 밤 길고 긴 비행시간에 아무 생각 없이 곯아떨어지고자 잠을 안자고 버틴 결과 그나마 크게 괴롭지 않게 절반의 비행시간은 버텨냈으나, 언제나 그렇듯 남은 시간은 두 배 세 배로 늘어난다. 비행기 안에서 이렇게 세상의 종말을 맞이하나 싶은 망상이 들 때쯤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과 함께 거대한 비행기의 몸체가 하강하기 시작했고, 창문 밖으로 미니어처 같은 세상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래전에는 콧김이 서릴 만큼 창에 가까이 얼굴을 대고 이 풍경을 지켜보기 위해 온 종일이라도 기다릴 수 있던 모습이 어느샌가 이렇게 심드렁하게 변해 있다는 사실만이 이제는 짐짓 놀랍기도 하다.

긴 여정을 끝내고 공항 밖으로 나온 베를린의 기온은 정신이 번쩍 들만큼 춥다. 한국보다는 더 추울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에 맞게 조금 두툼한 가디건을 챙겨 오긴 했지만, 이건 두툼한 가디건 가지고는 될 일이 아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거리의 사람들은 두툼한 패당으로 무장하고 종종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급하게 트렁크를 열어 두툼한 스웨터를 하나 꺼내어 안쪽에 걸쳤더니 조금 낫다. 지난 오월에 왔을 때보다 도시는 더 무채색으로 변해 있었고, 거리는 온갖 축제로 더 붐비는 상황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텅 빈 느낌과 휑한 기분까지 들었다. 아마 계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베를린 아트 위크는 마침 숙소와 멀지 않은 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곳이 있어 다음날 밤 걸어서 가 볼 수 있었다. 올 때마다 느끼지만 이 곳은 밤늦게까지 전시를 볼 수 있다는 면만큼은 늘 부러웠다. 간단한 술과 음료가 있는 전시장은 늦은 밤에도 사람들이 꾸준히 모여들었고, 사뭇 진지한 대화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인다. 작업 하나하나 길고 긴 시간을 두고 감상하는 자들이 눈에 띄는 이유는 자주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아무리 오랜시간 작업을 해서 내놓은들, 그것과 상관없이 관객이 작품 감상에 할애해 주는 시간은 10초 내외에서 길다 싶으면 1분 정도다. 그러나 여기서는 작업 하나하나를 시간 단위로 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외려 빠르게 움직이는 이들이 눈에 두드러진다.

개인적으로는 전시 기획 자체가 작업이다. 그 안에 들어간 하나하나의 작업들은 사실 크게 눈에 띄는 것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획 자체가 좋고, 분위기 형성이라는 게 이토록 중요하다. 그런 생각들을 이어가며 이리저리 층을 옮기고 건물을 옮기며 전시를 대략 다 훑어보자 새벽이다. 그 검푸른 새벽에도 여전히 입구 쪽에 사람들이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게 보인다.

카셀은 전 지역에서 이 전시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넘쳤고, 이 열정과 관심이 부러웠다. 그러나 가장 기대를 가장 많이 했던 카셀 도큐멘타는 참혹할 만큼 내게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카셀에 예술은 없었다. 적어도 내 눈엔. <출처=artviewer.org documenta-15-documenta-Halle_84>

며칠 후 찾은 베를린 아트 페어는 한국 화랑이 처음으로 참여했다고 해서 사뭇 먼 거리였지만 템펠호프로 향했다. 자칫 숨 막힐 정도로 꽉 짜인 특유의 공기 때문에 페어 자체에 그닥 큰 관심이 없었지만 예전 공항의 모습도 궁금했고, 이 곳의 아트 페어 분위기에 대한 호기심이 자연스럽게 생기기 시작했다.

아마도 물류창고로 쓰던 공간을 페어 공간으로 쓴 듯하다. 층고는 높았고, 공간은 시원시원하게 터져 있었고, 다음 부스로 넘어가기 위해 몸을 몇 번이나 작게 만들어야 할 만큼 관객들은 넘쳐났다. 보통 페어에는 바로 팔아도 손색없을 만큼 마감처리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작업들이 넘치는데, 베를린 아트페어에는 실험적 작업들이 중간중간 알맞은 발란스를 이루며 디스플레이 되어 있었다. 일종의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다.

한국에서는 처음 참여했다는 화랑에 들어가니 빨간 딱지가 제법 많이 눈에 띈다. 큰 책상에 홀로 커피도 없이 앉아 있던 큐레이터가 마음이 쓰여 행사장 내부에 있는 까페에서 커피를 하나 사서 가져다주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페어를 다 둘러보는 데까지 하루 종일이 걸렸을 만큼 규모가 작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미술관련 행사는 이 무채색의 도시에 유일한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는 듯 생기 있었다. 한동안 그 활발한 거래와 관심도가 높은 관객들, 열정이 넘치는 큐레이터들과 화랑 사이를 헤집고 다니고 있자니 피로가 거대한 파도처럼 한꺼번에 밀려든다.

그 때까지도 전시에 대한 생각이 하나도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쉽게 일종의 ‘허무주의’로 가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생각의 긴장감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제는 카셀 도큐멘타가 남았다. 베를린에서 기차 타고 약 3시간 정도를 가야 하는 카셀은 이제 종료일까지 딱 이틀이 남은 상황이었다. 종료 하루 전날 도착한 카셀은 전 지역에서 이 전시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넘쳤고, 이른 아침에 도착해 여유 있게 보려했으나 문을 열기도 전에 이미 많은 인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 열정과 관심이 부러웠다. 달리 문화 강대국이 아니겠지. 미리 예약을 하지 않은 탓에 티켓창구가 열릴 때까지 기다렸고, 이미 한바퀴는 족히 돌만큼 길게 늘어선 줄 맨 뒤에 나도 자릴 잡았다.

어쩌면 가장 기대를 가장 많이 했던 카셀 도큐멘타는 참혹할 만큼 내게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늦은 밤까지 두 다리가 퉁퉁 붓도록 기다리고 입장하고를 반복하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둘러본 카셀에 예술은 없었다. 적어도 내 눈엔.

함께 카셀에 갔던 동료작가와 중간에 커피를 한잔 마시는데 서로 지쳐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상황에 그가 말했다.

“이번 카셀은 예술은 없고 예술교육만 있네.”

흠 잡을 곳 없이 명확한 말이었다. 다만 이토록 열정적인 참여와 관객들의 관심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늦은 밤에도 작업들을 만날 수 있는 열린 시간대가 많은 미술 행사도 한 몫 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이 곳에서의 시간들도 거의 한 달이 다 지나가고 귀국까지 3일 남았다. 전시에 대한 생각은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으나 무겁진 않았다. 사랑받지 못한 채로 혼자 진지한 시간들에 대한 염증이 이렇듯 좋은 영향이 되기도 한다.

그나저나 베를린 물가는 갈수록 오른다. 커피 한 잔을 3000원대에 마실 수 있는 곳은 이제 싸구려 호스텔 밖에 없는 것 같다. (중기이코노미 객원=김윤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