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가 여기저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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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동료가 여기저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돼 Life is pain.ting #60. 월식

기사입력2022-12-02 15:13

김윤아 작가 (bombbi0401@naver.com) ㅣ다른기사보기

일정대로 상반기 입주작가들의 전시가 마무리 되고, 그들이 떠난 자리에 하반기 작가들이 들어올 예정이다. 레지던시는 초반에는 간혹 다 같이 모여서 식사도 하고 술자리도 갖곤 했지만, 릴레이 전시가 촘촘히 다가오면서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 작업실에서 나오질 않는 분위기다. 나 역시 작업이 흐름을 타고 개인전 준비로 더 바빠지면서 거의 모든 시간을 혼자 보내고 있다.

간혹 그런 시간들이 길어지다 보면 새벽 어느 시간대 즈음엔 정말이지 지구에 유일하게 남은 장소가 바로 이 작업실인양 고립된 기분에 강렬하게 사로잡힐 때도 있다. 더구나 한창 바쁘게 전시 준비를 했던 상반기 작가들의 경쾌한 작업실 소음들이 사라지고 나니, 간혹 전화기를 들어 누군가의 생존을 확인하거나 나의 생존을 알리고 싶어지는 마음마저 든다.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대가 지나고 나면 적막감이 두꺼운 벽처럼 들어차서 방해되는 순간이 오고, 그럴 때면 팟캐스트나 음악을 틀어 놓고,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 영화나 틀어놓고 작업실의 적막을 조금이나마 깨트린다. 전화를 걸어 잠깐 동안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조금만 쉴 요량이라 길어질 지도 모르는 통화가 부담되어 근황이 궁금한 몇몇의 SNS를 조금 뒤적거리다가 흔적 몇 개(좋아요나 하트 버튼) 따위를 남기고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간혹 적막을 뚫고 건물 어디선가 공구를 돌리는 소리 같은 소음이 들려오곤 하는데 그럴 때면 반가움마저 든다. 레지던시의 매력이 그런 점에 있지 않나 라는 생각도 든다. 일반 가정집 건물이나 빌라 아파트 같은 곳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니 말이다. 외려 그 소음을 이웃이 반가워 한다는 건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전시를 앞두고는 탈진이 되지 않고서는 잠들 수 없는 괴로움이 밀려온다. ‘불면’, 익숙해 질만도 하지만 괴로움이라는 게 익숙해진다고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다.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고, 작업시간을 적절하게 배치해 놓는 작가들도 있지만 수 년간 틈틈이 그렇게 이어보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허기를 채우고 작업실에 늦은 밤이 찾아오면 하루 내내 이어진 작업을 바라보다, 뒤돌아섰다가 다시 작업을 하고, 체력이 방전이 되면 잠들면 그만이건만, 남은 시간에는 작업노트 작성과 캡션을 정리하고, 사무실에 보내야 할(전시관련 서류) 일들을 한다. 그마저도 체력이 방전이 된 상태에서 소위 말하는 ‘좀비모드’의 상태에서 하다보니 시간이 끝도 없이 길어지고, 거의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몸을 눕히는 꼴이다.

계절도 가끔은 뛰어넘고, 시간은 알 수도 없고, 날짜 개념은 특별한 약속이 있지 않는 한은 모르고, 요일은 당연히 모르는 날들이다. 가끔 작가들끼리 식사를 하다가 ‘오늘 무슨 요일이지?’ 라고 누군가 물으면 누구하나 쉽게 대답하는 걸 본 적이 없다. 한번씩 작업을 접고 작정하고 누워 이러한 삶들의 파편을 곰곰이 작은 방 위에 둥실 띄워 놓고 바라보고 있자면 실소가 터지기도 한다.

<이미지=이미지투데이>

아무튼 개인전을 앞두고는 모두가 작업실에서 하얀 밤을 보내고 있고, 레지던시는 그나마 그 공기를 함께 느끼는 동료들이 여기저기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얼굴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못해도 묘하게 위안이 되기도 한다.

음식 배달료가 너무 올라서 잠깐 작업을 손에서 놓아도 되는 시간대에 가능한 음식점으로 가서 먹으려고 하다 보니, 꼴이 엉망인 상태로 식당에 들어서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주로 입는 ‘깔깔이’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있고, 각종 안료들이 잔뜩 묻어 있고, 작업바지라고 다를 바 없다. 어차피 허기만 채우고 금방 돌아올 요량이라 그 상태로 손만 씻고 나가곤 하는데, 사정이 그렇다 보니 음식점에서는 종종 어디 인테리어 공사하는 중이냐는 질문도 받는다. 식사를 마치고 들어서면, 작가들 방문 앞마다 배달음식들을 시켜먹고 내놓은 그릇들이 나와 있곤 한다. 그걸로 누가 지금 스튜디오에 있는지 알아차린다.

릴레이 전시가 시작되면서 이제는 단톡방마저 조용하다. 전기세 납부나, 공공시설이나 일정에 관한 알람 외에는 별 소식이 없다. 이를테면 커피를 한잔 같이 하자거나, 누구누구 작가 방에서 소박하게 술 한 잔 곁들이자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실상 있다고 한들, 나 역시 마음 편히 참여할 형편이 못되니 이심전심이다.

작업실에 돌아와 커피를 한잔 내려 마시고, 다시 작업들을 천천히 살펴보고, 사진을 몇 장 찍어둔다.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실을 청소했다. 그래봐야 티도 안나는 거지만, 다 쓴 물감통이나, 일회용 커피컵들, 작업할 때 쓰던 휴지조각이나, 다 쓴 스프레이 통들을 한꺼번에 치우는 일들은 보통 4~5일 간격으로 하는 것 같다. 오래된 습관이지만 작업이 이어지면서 고립되는 느낌이 밀려오는(특히, 개인전을 앞둔) 기간에는 물리적으로 ‘작업’ 자체에 관한 일들과 생각 외에는 전혀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외로움’ 이라는 것이 이제는 방해가 되지도 않는데 어쩌면 그 특유의 외로움과 친구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실상 그렇지 않고서야 작업을 이어갈 수도 없다.

그런 저런 잡념들을 작업실 청소하듯 뚝딱 털어내고 전시 연출에 문제가 될 수 있는 것들을 작성하고, 준비할 것들을 적어 나갔다.

그 때 즈음 메시지가 하나 들어와 전화기를 보니 동료 작가가 월식이라며 달 사진을 하나 보냈다. 동그란 쿠키를 한 입 배어 물은 것 같은 달 모양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오늘이 월식인지도 몰랐던 게 나 뿐만은 아닐 것 같아 단톡방에 사진을 띄워 보냈다. 그러자 몇 분 지나지 않아 단톡방 알람이 바빠진다. 몇몇은 월식인걸 알고 촬영한 사진을 보냈고, 몇몇은 나처럼 월식인지도 몰랐다는 내용의 글들이 올라왔다.

모처럼 그렇게 ‘월식’을 핑계로 근황을 주고받았다. 반갑게 안부와 소식을 간단히 주고받고 건물 옥상에 올랐다. 마른 나뭇가지와 낙엽이 떨어진 컴컴한 옥상에서 바라본 하늘은 근사한 월식은 지나가고 평범한 밤이다.

그날 밤 옥상에서 아마 비슷한 생각으로 올라왔을 다른 작가들을 우연히 만났고, 그 반가움에 다들 피식피식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가 피로가 쌓인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웃는 얼굴들은 따듯해 보인다. 그렇게 그날 밤은 옥상에서 평범한 하늘을 같이 바라봤고, 그 중 한 작가가 얼른 작업실로 가서 커피를 들고 올라와 함께 마셨다. 허리가 많이 아픈데 어디 병원을 다녀왔다거나, 밴딩하는 곳이 어디가 싸더라, 누구누구 전시하는데 가봤더니 어떻더라는 내용의 수다가 월식이 있던 밤하늘 아래서 우리가 주고받은 대화들이다. 그리고 나는 그게 참 좋았다. 거대한 우주 아래 방향을 잃지 않는 대화 같아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