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언어 다양성’을 보존하는 기술로 발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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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미래 ㅣ HIT! 이 기술 AI, ‘언어 다양성’을 보존하는 기술로 발전해야 다양한 언어의 파괴자인가 위기 언어의 구원자인가…AI의 두 얼굴㊦

기사입력2023-08-28 00:00

안수영 기자 (syahn@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시 ‘꽃’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이처럼 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신의 생각을 확장하고 타인과 감정을 교류한다. 그래서 한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가 그 사람이 속한 세계의 한계를 결정 짓는다는 말도 있다.

언어는 한 사회의 고유문화를 담은 그릇…다양성 보존을

혹자는 이런 의문을 가질지도 모른다. 바벨탑 신화에 나온 것처럼 인간의 언어가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말이 통하기 어려웠으니, 인류가 특정 언어만 쓰는 것이 더욱 쉽게 소통하는 방법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또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변화하고 사라지듯이, 마치 언어도 적자생존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언어는 해당 언어를 쓰는 사회 또는 집단의 고유 문화를 반영하는 그릇이다. 다양한 언어가 보존돼야 다양한 언어 속에 담긴 다채로운 문화와 창의성도 보존될 수 있다. 자연에서 생물 다양성이 지켜지지 않으면 생태계가 무너질 수 있는 것처럼, 인간 세계에서도 언어 다양성이 지켜지지 못한다면 인간이 생각하고 표현하며 상상하는 범위도 축소되고 획일화될 수 있다. 비록 불편하더라도 외국어를 배워 소통하는 것은, 나와 다른 타인이 이 세상에 존재함을 겸허히 인지하고 상호 다름을 탐색하는 출발점이 된다.

하나의 언어를 잃으면 그 언어 속에 담긴 문화를 전부 잃게 되는데, 한 번 잃어버린 언어를 되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에 1999년 유네스코(UNESCO)는 문화 다양성과 다언어주의를 증진하고 모어(모국어)의 중요성에 관한 인식을 고양하고자 매년 2월21일을 ‘세계 모어의 날’로 제정하기도 했다.

AI의 언어 데이터 학습, 균형·윤리적 관점에서 이뤄져야

그렇다면 언어 다양성 보존을 위해 AI를 어떻게 개발하고 사용해야 할까?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자원은 ‘데이터’다. 언어 소멸을 막으려면 해당 언어가 많이 쓰여야 하는데, 이를 기술 발전의 흐름에 맞게 해석하면 데이터로 남겨야 한다. 따라서 AI가 소수어로 이루어진 데이터를 빼놓지 않고 학습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여기에는 잠재적인 문제도 따른다. 가장 좋은 방법은 모국어를 기반으로 한 AI를 만들고, AI를 통해 모국어를 보존하며 모국어 데이터를 재생산하는 체계를 갖추는 것이다. 하지만 소수어를 쓰는 민족이나 국가가 막대한 자본과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AI를 자체 개발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렇다면 글로벌 빅테크 기업이 만든 AI가 소수어 데이터를 학습할 수밖에 없는데, 소수어를 가진 민족이나 약소국이 AI를 보유한 빅테크 기업에 기술적으로 종속될 우려가 있다. 또한 빅테크 기업이 제3자(미국)의 관점에서 소수어 데이터를 바라볼 경우, 소수어 고유의 특성과 그 안에 담긴 관점, 가치관 등을 오롯이 보존하고 반영할 수 있는지도 고민해 보아야 한다.

언어의 다양성을 보존하기 위해 AI를 어떻게 개발하고 사용해야 할까? AI가 소수어로 이루어진 데이터를 빼놓지 않고 학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균형적이고 윤리적인 관점에서 상호 협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미지=이미지투데이>

이러한 문제를 보완하려면 균형적·윤리적 관점에서 상호 협력이 필요하다. 소수어를 사용하는 국가나 민족은 모국어 보존과 공유를 위해, 언어 고유의 특성을 오롯이 담은 AI 학습용 데이터를 따로 모아두어야 할 수도 있다. 한편 빅테크 기업은 AI가 최대한 많은 언어를 학습하고 지원하도록 노력해,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확보해야 할 것이다.

앞서 소개한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의 이중언어 및 언어심리학 연구소장인 비오리카 마리안은 워싱턴포스트 기고문에서 “AI를 공공의 이익에 맞도록 개발하고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AI의 확산이 인간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가능한 한 다양하고 많은 언어가 사용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AI의 순기능…잊혀진 언어로 적힌 문화 유산 발굴한다

물론 AI가 인류의 언어 다양성에 꼭 악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며, 반대로 사멸 위기에 처한 언어를 보존하는 순기능을 발휘한 사례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는 지난 2019년 7월 ‘문화 유산을 위한 AI’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그리고 AI를 활용해 잊혀져 가는 소수어를 번역하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멕시코 남서부에서 발원한 고대 마야(Maya) 문명의 유카텍어(Yucatec Maya)와 15~17세기 오토미(Otomi)족이 사용한 오토미어(Querétaro Otomi)를 번역한 것이다.

카카오는 지난 2020년 AI를 활용한 제주어 번역을 선보였다. 카카오브레인 연구팀은 △제주어 학습 데이터셋 △딥러닝 기계번역 모델 △딥러닝 음성합성 모델을 구축하고, AI가 제주어를 학습 및 발화하도록 구현했다. AI를 통해 제주어의 소멸을 막고, 제주어 속에 담긴 고유의 문화가 후대에 이어질 수 있도록 다리를 놓은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과 한국천문연구원은 지난 2021년 AI를 활용한 고전 번역서비스를 선보였다. 해당 서비스는 ‘승정원일기’ 원문과 ‘천문 고전’ 원문을 대상으로 자동 번역 결과를 제공한다. 읽고 해석하기 어려워 잊혀져 가던 한문 고전이 AI 기술을 통해 후대에 전해질 가능성이 싹튼 것이다. 문자 난이도가 높은 한문의 특성과 기계학습 데이터의 부족으로 번역의 품질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향후에도 성능 향상이 이뤄질 예정이며 다른 고전 문헌의 자동 번역도 확대될 예정이다. AI를 활용한 고전 번역이 본격 궤도에 오른다면, 역사 연구에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 있으며 이를 활용한 창작물도 탄생할 수 있다.

AI 개발…‘언어 다양성’을 보존하는 기술로 발전해야

기술은 인간에게 무조건 이익만을 가져다 주지도 않고, 반대로 무조건 해악만을 끼치지도 않는다.

기술의 가치는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이 ‘문화 다양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우선시한다면, 이 지구상의 언어들은 다채로운 문화 유산으로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AI를 개발하는 사람과 AI를 사용하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AI는 우리에게 더욱 풍요로운 미래를 선사하지 않을까? 중기이코노미 안수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