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고 들어서고…닮았지만 닮지 않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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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사라지고 들어서고…닮았지만 닮지 않은 도시 콘크리트 히드라의 도플갱어…황원해 작가

기사입력2023-10-10 13:37

황재민 미술평론가 (inthebox28@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우연히 남산 근처를 산책하다가 힐튼 호텔(밀레니엄 힐튼 서울 호텔)을 보았다. 영업이 한창일 저녁이었지만 조명이 전부 꺼져 있었다. 건축가 김종성이 설계한 남산 힐튼 호텔은 1983년 완공된 이래 약 40년 가까이 운영되었으나, 코로나 이후 찾아온 경영난으로 결국 철거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힐튼 호텔이 철거된 자리에는 38층에 이르는 복합 건물이 세워질 예정이라고 들었다.

황원해, ‘Beams of light’, Acrylic on canvas, 165×110cm, 2021.

오래된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들어서는 장면. 무척 익숙한 풍경이다. 도시는 시시각각 변한다. 지난달 찾았던 카페가 어느새 헐리고 즉석 사진관이 들어선다. 어제 타코야키를 팔았던 곳에서 오늘은 탕후루를 팔고 있다. 추억의 한편을 차지했던 가게 역시 문을 닫고 대형 프랜차이즈 가게가 자리 잡는다. 내가 겪은 사라짐은 애도할 시간도, 필요도 갖지 못한다. 애도를 잃어버린 사이 도시의 속도와 상실에 점점 더 익숙해진다.

이탈리아의 문화 이론가 마테오 파스퀴넬리는 젠트리피케이션과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혼란스럽게 변화하는 거대 도시를 ‘콘크리트 히드라’라고 불렀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 히드라는 목이 잘린 곳에서 2개의 머리를 새로 만들어 내는 불사의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끝없이 새로운 머리를 만드는 히드라처럼 도시는 새로운 건물과 공간을 토해낸다. 쏟아지는 새로움 때문에 현기증이 일 지경이다.

그리고 황원해는 이 거대한 히드라의 움직임을 바라본다. 도심에서 오래 거주해 온 작가는 자신이 체화한 도시의 심상을 회화로 옮겨내고자 했다. 작가의 회화는 밀도 높은 추상적 화면을 만들어 내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 숨어 있는 도시의 자취를 찾을 수 있다. 반짝이는 건물의 외벽, 매끈하게 시공된 대리석의 질감, 앞뒤 순서를 잘 분간할 수 없는 원근법이 망가진 풍경. 복잡한 화면 속에서 찢어지고 다시 자라나는 ‘콘크리트 히드라’의 운동이 관측된다.

황원해, ‘Emulsion’, Acrylic on canvas, 165×380cm, 2021

작가는 도시의 풍경이나 건축물의 외양을 그대로 캔버스 위에 옮겨내기보다는, 도심에 살며 자신이 얻은 불가해한 감각을 회화의 형태로 번안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듯하다. 황원해의 회화가 도시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한 풍경화가 아니라 추상화의 양식에 가까운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다. 그 결과 작가의 작업에서는 하나의 틈새가 발생한다. 이것은 도시와 불화하는 개인이 만들어 낸 틈새이며, 또한 도시와 불화하는 회화가 만들어 낸 틈새다. 작가가 그린 화면에서는 서로 다른 것들이 층층이 쌓인 겹(layer)의 형상이 엿보인다. 황원해는 철거와 재건이 수도 없이 반복되는 도시의 운동을 한층 한층 쌓아 겹을 만든다. 물론 이 겹은 여러 층의 틈새로 구멍이 뚫린 채다.

하지만 이 틈새들이 삭막한 도시에 트인 숨구멍과 같은 것은 아닐 듯하다. 오히려 이것은 도시가 가장 숨기고 싶어 하는 균열이다. 도시는 빈 공간이 그대로 비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숨기고 싶어 한다. 빈 공간을 과밀하게 채우고 확장하는 것이 거대 도시의 존재 양식이기에 그럴 것이다. 빈 틈새는 잠재성이며, 잠재성은 도시의 적이다. 작가는 자신이 감각한 틈새들을 회화의 형태로 옮기고 그렇게 찾아낸 균열을 도시에게 되돌려준다.

도플갱어는 나와 닮았지만 내가 아닌 정체불명의 존재를 뜻하는 단어로, 각종 공포 장르에서 등장하는 단골 모티브 중 하나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도플갱어가 본능적인 공포를 안겨주는 이미지라고 말한 적 있다. 그것은 나의 고유한 정체성을 훔치고, 내가 나로 인하여 교체될 수 있으리라는 공포감을 준다. 황원해는 신체를 이용해 끝없이 확장하는 메트로폴리스를 감각하고, 닮았지만 닮지 않은 도시의 도플갱어를 만든다. 화가와 그의 신체는 그렇게 도시에게 공포를 안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황재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