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다하게 남긴 것을 모아 새로운 가능성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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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잡다하게 남긴 것을 모아 새로운 가능성을 열다 남겨진 사소한 것으로부터 새 이야기가 시작…지키는 마음

기사입력2023-11-28 17:00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현충원에 다녀왔다. 흐리고 비 오는 날이었다. 친가 가족들이 함께 모일 예정이라, 새벽녘 일어나 아버지와 차를 타고 큰아버지를 모시러 갔다. 기억 속 큰아버지의 선명하고 윤기 나던 얼굴은 내 모습이 달라진 것만큼 많이 변했다. 지난 몇 년간 이런저런 핑계로 가족들과 보낸 시간이 많지 않았고, 낯선 얼굴을 마주하고 느끼는 생경함은 빈 시간의 무게로부터 오겠거니 생각했다. 서울에서 대전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나는 말없이 창문에 맺힌 빗방울을 세다 잠깐 잠들었다.

현충원은 증조부가 안장된 곳이다. 나는 증조부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가족들이 마음을 모아 계속 기억하려던 분이라는 걸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올해 늦여름 아버지로부터 증조부의 한시(漢詩)집을 건네받았다. 가족들이 힘을 모아 조부가 보관하고 있던 증조부의 시와 여러 사료를 모았고, 한학에 조예가 깊은 한시 번역가와 함께 이를 편역했다고 한다. 책 소개를 읽으며 그간 희미하게 알고 있던 먼 시기의 한 사람을 그려볼 수 있었다. 1882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태어나 마을에 야학회를 설립했고 항일운동을 하며 시를 짓던 사람. 시는 주로 사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난초, 국화, 연꽃, 귀뚜라미, 나이 많은 소나무를 봤던 일. 절에서 들려온 종소리를 들었던 경험 같은 것. 쓰인 시를 읽다 보니 왠지 모르게 한 많은 사람이라 생각됐다.

현충원에 들어설 때 빼곡히 심어진 묘석과 기념 동상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를 기억하고 지키는 마음으로 세워진 돌이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져 없어졌구나. 다른 가족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차에서 내려 묘역을 걸었다. 이곳에 촘촘하게 들어선 검은 돌덩이에는 영면한 이들의 이름과 생시가 새겨져 있었고, 그들에게 건네는 말, 가계도 같은 것이 함께 쓰여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영전에서 머리를 숙이며 참묘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곳은 사라진 사람을 위한 곳이기도 했지만, 살아가는 사람을 위한 장소라고 생각했다.

<촬영=박선호>

한 사람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그를 기억하던 사람도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그들과 나눈 대화와 온기 역시 사라질 것이다. 아마도 인류는 망각의 힘을 무력화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기록과 기념을 발명했을 것이다. 무수하게 들어선 비석에 새겨진 말을 읽으며 누군가를 떠나보낸 사람들이 남기고 지키고자 한 마음을 생각했다. 죽음뿐 아니라 예술 역시 그러한 것이 아닐까. 작품 역시 유한한 인간의 시간을 알고 잠시나마 그 한계를 거스르고자 남긴 것일 테다. 나보다 백 십 한 살 일찍 태어난 증조부의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그가 종이에 쓴 시 구절을 통해 우리가 늦게나마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멀지 않은 과거에 나는 이처럼 뭔가를 남기고 모으고 지키려는 마음이 없다면 작업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들은 대개 충분히 기록되지 못해 사라지거나 누락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너무 사소하다 못해 남겨져야 할 것이라 생각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언어로 남기기 어려운 추상적인 감각과 감정이었다. 이것들은 흡사 잡다한 것들의 모음일 수 있지만 미술 혹은 예술이 가지는 잠재성이라고 믿게 됐다. 하지만 오늘날 실로 미술은 이미지의 세계로 향하고 있다. 더 새로운 모양과 형태, 기법과 색, 사진 찍기 좋은 인상을 가진 것. 무엇을 남길까 고민하는 일이 전제되지 않고 그저 남겨지고 확산되는 것. 매혹적인 것, 신선한 것, 유행하는 것. 매끈하고 예쁜 것. 일상에 영향을 주는(influence) 것.

독일의 철학자이자 문예 비평가인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평생 잡동사니를 사 모았다. 우편엽서와 그림, 장난감과 인형들, 각종 상자 따위를 백화점에서, 노점상에서, 박물관에서 샀다. 자신이 사 모은 소중한 잡동사니가 러시아 공항에서 세관에 걸릴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하루 일찍 공항에 간 적이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잡동사니들은 세관원이 기록조차 하지 않았던 아주 사소한 것으로 여겨졌고, 벤야민은 자신의 수집품이 홀대당해 당황스러워했다. 이처럼 잡동사니로 여겨지는 사소한 것은 대개 세상에서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벤야민은 사소한 것이 가진 혁명의 가능성을 믿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살아가기 위해 한 사람을 가장 사소한 곳에서부터 기록하고 잡다하게 남긴 것을 모아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낸다. 남겨진 사소한 것으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연을 바라보며 느낀 서글픔이 담긴 증조부의 시를 생각한다. 오랜 기간 보관되었던 시를 꺼내고 남긴 가족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영전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이들의 마음을 생각한다. 잡동사니를 사 모았던 발터 벤야민을 떠올린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