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근 공장에서 화학물질 누출사고 발생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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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정보 ㅣ 인사노무 인근 공장에서 화학물질 누출사고 발생했다면 ‘작업중지권’…대법원, 이를 행사한 노조 대표자에 대한 징계는 부당

기사입력2024-01-08 13:00

이동철 객원 기자 (leeseyha@inochong.org) ㅣ다른기사보기

노동OK 이동철 상담실장

일터에서 사고가 났다고 가정해 보자. 화재나 생산원료 중 독성물질이 유출되어 일하는 노동자들이 위험에 처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산업안전보건법 제52조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는 권리를 노동자에게 보장하고 있다. 이른바 ‘작업중지권’이다.

사업주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노동자가 믿을 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을 때’에는 산안법 제52조 제1항에 따라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한 노동자에 대해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노동자의 자체 판단으로 작업을 중지할 수 있는 권리인 작업중지권의 효력 요건인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노동자가 믿을 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을 때’에 대한 별도의 규정은 없다. 이때문에 사업장에서 발생한 각종 사고나 재해에 대처해 노동자는 폭넓게 그 위험성을 주장할 것이며, 사업주는 폭이 좁게 이를 해석해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의 한계를 정하려 할 것이다.

최근 대법원은 노동조합의 대표자가 사업장 인근에서 화학물질이 누출된 사고에 따른 피해를 우려해 작업중지권을 행사하자, 회사가 이를 무단이탈이라 해 징계처분을 내린 사건에 대해 해당 징계처분이 부당하다는 판결(대법원 2018다288662, 선고일 2023.11.9.)을 내렸다.

◇사건의 경위=피고는 세종특별자치시에 위치한 자동차 부품 제조회사다. 원고는 이 회사 소속 노동자로 산별노동조합 해당 회사 노조지회의 대표자다. 2016년 7월 오전, 회사가 속한 산업단지 내 다른 사업장에서 ‘티오비스’ 약 300리터가 누출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티오비스’는 상온에서 독성이 강한 황화수소를 발생시키는데 이를 흡입하는 경우 눈, 코, 목 등에 자극이 일어날 수 있고, 천식환자에게 호흡곤란이 유발되며 높은 농도의 황화수소를 흡입하는 경우 후각마비가 올 수 있다.

해당 사고로 오전 8시 이후 세종시 소방본부 선착대 및 현장대응단이 사고현장에 도착해 누출된 화학물질을 조사했고 화생방 전담 군사부대가 출동했다. 소방본부는 재난지휘통제소를 설치하고, 오전 8시30분 무렵 사고지점으로 반경 50m거리까지 대피하라는 취지의 방송을 했다. 오전 9시20분 무렵에는 누출사고 지점으로부터 반경 500m~1km 거리에 있는 마을 주민들에게 창문 폐쇄 및 외불 출입자제 당부 대피방송이 이뤄졌고, 피고 회사가 속한 산업단지 관리사무소장이 해당 사건 통제선내 공장 노동자들에게 대피를 유도했다.

원고는 사고 당일 오전 9시경 고용노동부에 이 사건 누출사고 대책 마련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고, 피고 회사 측에 신속한 조치를 촉구하는 취지의 공문을 발송했다. 이후 오전 10시경 피고 회사 노무이사와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소속 공무원(근로감독관) 등과 누출사고 대책을 논의했는데,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소속 공무원이 대피를 권유했고 해당 산단 다른 사업장 노조위원장이 원고에게 누출사고 현장에 함께 가볼 것을 권유했으나 피고는 이를 거부했다.

이후 원고는 소방본부를 통해 피고 회사에 대한 대피명령이 이미 있었다는 취지의 답변을 듣고, 피고 회사 작업장을 이탈하면서 당시 작업 중이던 소속 노동조합 조합원 28명에게 대피하라 말했고, 피고 회사 노무이사에게 상황을 통보했다.

화재나 생산원료 중 독성물질이 유출되어 일하는 노동자들이 위험에 처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는 권리를 노동자에게 보장하고 있다. 이른바 ‘작업중지권’이다. <이미지=이미지투데이>

피고 회사는 2016년 11월 원고가 조합원 28명에게 작업장을 무단이탈 할 것을 지시했다는 이유로 원고에게 정직 2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회사 측은 당시 소방본부 문의 결과, 피고 회사가 대피가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는 취지의 답변을 받았던 점을 들어 대피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이에 원고는 2017년 3월 징계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정직처분 무효 확인을 구하는 소를 법원에 제기했다.

◇원심의 판단과 쟁점=원심인 대전고등법원 재판부는 피고 회사의 손을 들어 줬다. 재판부는 판결문(2018두 34480, 선고 2020.8.20.)을 통해 “(원고가) 재난지휘통제소를 방문해 객관적으로 작업중지권을 행사할 상황인지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을 거부했다”며,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 근거가 있었다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의 쟁점은 피고 사업장이 아닌 인근 공장에서 발생한 화학물질 누출사고와 같은 재해 상황에서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행사가 정당한지 여부다. 산안법상 작업중지권 행사의 전제가 되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의 판단 기준과 이를 노동조합 차원에서 행사할 경우 정당성이 있는지가 세부적 쟁점이 된다.

◇대법원의 판단=대법원 재판부는 원심과 달리 원고의 ‘작업중지권’ 행사의 정당성을 인정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 누출사고지점으로부터 반경 10m 이상의 지점에서 황화수소가 검출되지 아니하였어도 황화수소의 분산으로 인한 피해 범위를 명확하게 예측하기 어려웠으며 상당한 거리까지 유해물질이 퍼져나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던 점 ▲이 사건 누출사고가 발생한지 24시간이 경과한 이후에도 오심, 어지럼증, 두통을 호소하는 피해자들이 다수 발생하고, 200m이상 떨어진 공장에서도 오심, 구토, 두통 피해자들이 다수 발생하였던 사정 등에 비춰 누출사고 반경 200m 정도의 거리에 있던 피고 회사 작업장이 유해물질로부터 안전한 위치에 있었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점 ▲원고가 피고 회사 근로자이자 동시에 노조 대표자로서 이미 화학물질 누출에 따른 대피명령을 내렸다는 취지의 소방본부 설명과 대피를 권유하는 근로감독관의 발언을 토대로 급박한 산재발생의 위험이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타 노동자들에게 대피를 권유한 점 등을 근거로 “산업재해 발생의 급박한 위험이 존재한다고 믿을 합리적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다.

작업중지권을 행사한 노동자에 대해 징계 등의 불리한 처우를 할 수 없도록 정한 산안법 관련 규정에서는 ‘(노동자가) 급박한 위험이 존재한다고 믿을 합리적 이유가 있다면’이라고 정당성의 요건을 제시하고 있다.

원고가 재난지휘통제소를 방문해 작업중지권이 필요한 상황인지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최소한의 노력을 거부해 산재발생의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믿을 합리적 근거가 없다고 본 원심과 달리, 대법원은 원고 노동자가 사고 당시 인식한 산재발생 위험을 기준으로 급박한 위험이 객관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엄격하게 해석하지는 않은 것이다.

또 다른 쟁점인 작업중지권의 집단적 행사의 정당성 부분에 관해서도, 대법원 재판부는 원고가 노조활동으로서 작업중지권을 행사한 것이 적법하지 않았다고 전제한 원심의 판단을 인정하지 않았다. 원심은 작업중지권을 노동조합이 행사할 경우 일상적으로 쟁의권으로 이와 같은 작업중지권이 악용될 가능성을 근거로 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학물질 누출사고와 같은 긴급한 재난 상황 앞에서 소속 조합원의 안전을 유지하는 것이 주요 임무인 노동조합의 대표자가 산안법상 작업중지권을 다수 조합원에게 행사 권고한 것이 노동조합의 집단적 작업중지권 행사로서 쟁의권과 같은 수준으로 취급한 원심의 판결은 본질상 집단적으로 행사될 수밖에 없는 작업중지권에 대해 너무 왜곡해 바라본 해석이 아닐 수 없다.

◇판결의 의의=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현장 노동자의 산안법상 작업중지권 행사의 정당성을 인정한 첫 판결이다. 노동자가 근로계약상 이행해야 할 작업수행의 의무를 놓고 현장을 떠나는 것은 근로계약의 불이행을 통해 사업주의 경영상 심대한 타격을 가하는 일이다. 이러한 경우 인사상 불이익 등의 사업주의 대상조치가 필수적인데, 노동자가 산재발생의 급박한 위험을 인식할 경우 그 정당성을 인정해 노동자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산안법상 작업중지권 관련 조항의 핵심이다.

작업중지권 행사의 필요성을 파악하기 위한 노력을 요구하거나 작업중지권이 노조의 쟁의권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그 행사의 정당성을 좁게 해석한 원심판결을 파기한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산안법이 작업중지권을 도입한 그 입법취지를 충실히 인정한 판결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노동OK 이동철 상담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