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에 묻혀 있는 무엇인가를 밝혀내고 있다

프린트

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어둠 속에 묻혀 있는 무엇인가를 밝혀내고 있다 ‘작은 세계’를 더 잘 보여주던 빛…타이베이 비엔날레 ‘스몰 월드’

기사입력2024-04-07 10:00

박선호 미술작가 (sunhopark.info@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주말을 끼고 대만 타이베이에 다녀왔다. 졸린 눈을 비비고 아침 일찍 공항으로 향했으나 비행기가 연발했다. 전날 내린 이례적인 폭설로 활주로를 급히 재정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전에 출발하기로 약속된 비행기는 정오가 돼서야 움직이기 시작했고, 약 2시간30분의 비행 뒤 타이베이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2023 타이베이 비엔날레(Taipei Biennial)’ 관람이었다. 타이베이 비엔날레는 ‘스몰 월드(Small World)’라는 주제 아래 2023년 11월18일부터 2024년 3월24일까지 타이베이 시립 미술관(Taipei Fine Arts Museum)에서 열렸다.

‘스몰 월드’는 우리의 삶에 대한 통제라는 약속과 커뮤니티로부터의 고립이라는 위협을 함께 제시한다. 전시는 지난 몇 년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팬데믹으로부터 출발한다. 거주 공간과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에 반응하거나 사회에 편재하고 있지만 비가시적인 영역에 놓인 것들을 재고하는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Arthur Ou, 2020, Untitled(Octavia with Meteor 1), 타이페이 현대미술관 설치 전경. <사진=박선호>

전시장 입구의 커다랗고 하얀 벽에 작가 아서 오우(Arthur Ou)의 사진 한 점이 걸려있었다. 사진의 제목은 Untitled(Octavia with Meteor 1)이며, 팬데믹 시기 전후 작가가 제작한 사진 시리즈 중 하나다. 오우는 그의 딸 옥타비아에게 작은 소행성 조각을 손가락 위에 균형 있게 올려놓도록 요청했고, 손가락을 실제보다 크게 보일 수 있도록 클로즈업(close-up)해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생생하게 기록된 지문과 반짝이는 조각이 함께 담겨 있었다. 선명하게 보이는 지문과 작은 행성 부스러기는 우주의 한 부분처럼 보였다. 이 사진은 눈높이에 알맞게 걸려있었고, 작품 주위를 둘러싼 시원한 여백 덕분에 프레임 안에 찍힌 것들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아주 작은 것을 담은 단 하나의 사진을 보여주기 위한 설치가 돋보였다. 설치 방식으로부터 어떠한 자신감과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어쩌면 누군가는 텅 비어 보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본격적으로 전시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비엔날레는 커다란 의제 아래 여러 개의 작품을 전시로 구성한다. 아서 오우의 작품뿐 아니라 전시장에 놓인 작품은 모두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을 기술을 경유해 가시화하는 과정을 담았다. 실은, 전시장에 붙어 있는 월 텍스트를 통해 기획의 글을 읽었을 때는 잘 깨달을 수 없었지만, 전시장에 놓인 일련의 작품들을 되돌아 보며 비로소 기획 의도를 느낄 수 있었다.

Hsu Tsun-Hsu, The More We Get Together Series, 1988~1998, 설치 전경. <사진=박선호>

‘Small World’에는 다양한 내용, 형식, 매체를 다루는 작품이 있었지만, 전시장에 놓인 것들을 더 세심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준 것은 ‘빛'이었다. 누군가는 전시장에 조명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 신경 쓰지 않을 것도 같지만, 이곳에 설치된 조명은 작품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도록, 때로는 작품이 단숨에 파악되지 않도록, 혹은 작품의 내용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장치였다.

전시장의 다른 한 편에서 휴츈수(Hsu Tsun-Hsu)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대만 민주주의 발전의 장면들을 사진을 통해 기록했다. 그가 찍은 흑백 사진들은 짙은 초록색 벽 위에 걸려 있었는데, 천장 가까이 설치된 조명의 빛이 액자 표면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피사체를 밝히는 순간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어둑한 전시장에서 생생하게 밝혀진 사진들을 보니 사진가가 셔터를 누른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벽면에 걸린 사진 속의 인물들이 가까이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설치의 기술적인 방식이나 의도 등 관련한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보지는 못했지만, 이 전시가 보여주고자 했던 ‘작은 세계’가 빛을 통해 비로소 밝혀지는 느낌이었다.

다음 층에서는 전쟁 후에 방치된 벙커를 찍은 폴 비릴리오(Paul Virilio)의 사진, 여러 가지 모듈을 결합한 형태의 나딤 아바스(Nadim Abbas)의 설치 작품이 함께 놓여 있었다. 다소 어두운 전시장의 왼편에는 작품에 꼭 맞는 모양의 스포트라이트가 비릴리오의 사진을, 푸릇하고 어슴푸레한 조명이 나딤의 작품을 조명하고 있었다. 이 빛들은 밝히려는 것 외의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기보다는 어둠 속에 묻혀 있는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비밀스러운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한 장면. 그리고 그것에 다가가는 사람들. 전시장을 나오는 순간까지 내가 보았던 이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Paul Virilio, Bunker Archeology Series, 1958~1965, 설치 전경. <사진=박선호>

이 외에도 인상적인 작품이 많았다. 전반적으로 ‘2023 타이베이 비엔날레’는 아주 세심한 방식으로 우리가 사는 작은 세계의 깊이와 너비를 충분히 보여주고 있었다. 글에서 언급한 사례 외에도 빛과 공간 그리고 작품의 관계를 고려하게 만드는 경험이 강하게 기억에 남았다. 전시를 봤던 경험 자체를 천천히 되새기고 싶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타이베이에서 봤던 작품들에 관해 조금씩 찾아보게 되었고, 내가 보았던 것들이 무엇인지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작품이 놓인 공간과 그곳을 둘러싼 빛은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작품의 일부가 되어 의미와 영향력을 확장했다.

전시는 작품을 무엇과 무엇 사이에 두거나, 어딘가에 내려놓거나, 벽에 거는 일이 아니다. 내가 전시장에서 보았던 조명과 빛처럼, 작가와 큐레이터는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더욱 명확하고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해 아주 작은 부분까지 고민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생략된 채 전시된 작품은 그 본연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드러내기 어려울 것이다.

최근에 정말 많은 전시가 열리고 있다. 그러나 전시를 보아도 좀처럼 오랫동안 마음과 기억에 남는 경험을 할 수 없다. 작품을 더 잘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고민이 전시에서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일까? 타이베이에서의 경험이 무척 귀하게 느껴진다. (중기이코노미 객원=박선호 미술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