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입을 수 있음’이 영원성에 앞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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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상처 입을 수 있음’이 영원성에 앞서야만 한다 영원함을 포장해보세요…그림 위를 덮은 소민경 작가의 인쇄물

기사입력2024-04-21 10:00

황재민 미술평론가 (inthebox28@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조슬릿(David Joselit)은 회화 매체에 대한 이론적 탐구를 계속하는 드문 연구자 중 한 명일 테다. 그는 비교적 최근 회화와 관련된 흥미로운 질문을 제기한 적 있다(사실 2016년이니, 최근이라는 말이 조금 어색하기는 하다). 모든 사람들이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며 사진을 찍고, 그렇게 찍은 사진을 SNS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공유하면서 이미지를 그야말로 분출하고 있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회화가 힘을 가질 수 있을까?

단순히 생각해보면, 대답은 비관적이다. 그러나 조슬릿은 회화가 그렇기에 오히려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의 의견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모든 예술작품에는 숨겨진 힘이, 말하자면 특이성이 있다. 그 힘은 말로 쉽게 형언될 수 없는 어떤 것이며 무한한 잠재성을 갖는 어떤 것이다. 이러한 잠재성을 온전하게 감각하려면, 그러니까 회화를 ‘진짜로’ 보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어쩌면 평생에 걸친 시간이 필요하다. 회화를 본다는 것은 완결될 수 없는 과제다. 핸드폰으로 사진 찍혀 회화가 걸려 있는 그곳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이동된다고 하더라도, 회화의 힘은 단순히 휘발되지 않는다. 그 힘은 디지털화된 사진 이미지 속에 표지(marking)되고 기보(scoring)된다.

여기서 ‘표지’와 ‘기보’라는 단어는 다소 낯설게 느껴지지만, 적확한 단어이기도 하다. ‘표지’란 특정한 사물을 표시하는 것, 흔적을 남긴다는 뜻처럼 생각된다. ‘기보’란 퍼포먼스나 악곡 따위의 ‘스코어(score, 악보)’를 기록한다는 말에 가까울 텐데, ‘표지’와 ‘기보’ 모두 사물의 실체를 흔적으로 간직한다는 의미와 연결된다. 악보를 보고 악곡을 연상할 수는 있을 테지만, 온전히 감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회화를 촬영한 사진을 보고 회화를 온전히 감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회화는, 가만히 전시장 벽에 붙박여 있더라도, 역설적으로 살아있다.

소민경, ‘Powder’, ink on paper, on acrylic on linen, 97×130cm, 2016/2021.

소민경은 회화를 제작하고 그 위에 회화 이미지가 복제된 인쇄물을 덮는다. 얇은 종이 한 겹이 회화를 덮고 있는 상황은 자연스럽게 질문 하나를 떠올리게끔 한다. 이미 완성된 회화를 왜 덮어야만 할까? 어쩌면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확장된다. 회화를 덮은 인쇄물과 인쇄물에 덮인 회화, 둘 중 ‘원본’은 무엇일까? 한 편으로 종이는 회화를 보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외부 환경으로부터의 보호이든, ‘원본’을 잡아채어 디지털 이미지로 환원하려는 개입으로부터든 말이다. 다른 한 편으로, 종이는 회화를 가로 막는다. 회화가 지니고 있다고 가정된 무한한 잠재성과 영원을 요구하는 유별난 정동이 종이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멈추어 선다.

그림 위를 덮은 소민경의 인쇄물은 작가에 의해 포장으로 비유된다. 포장은 뜯겨야만 하는 것, 내용을 감싸고 보호하다가 마침내 벗겨져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진다. 포장의 일생은 그것이 상처 입고 찢겨 사라지는 그때가 되어야 완결된다. 포장은 여러 장식이 올라갈 수 있는 소중한 장치지만 누구도 포장으로부터 영원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포장을 그림에 앞선 것으로 배치하는 소민경의 작업에서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오랜 질문을 되새기게 되는 이유다.

하나의 그림을 영원토록 볼 수 있다면, 하나의 그림에 대해 영원히 되뇌이는 것도 가능할 테지만…. 나는 이쯤에서 말을 멈추며, (포장된) 그림 앞에서 영원성의 무용함을 엿본다. 오직 영원하기만 한 것이 예술작품이라면, 그것은 영원함을 잃는 순간 예술이 아니게 될 테다. 영원함을 잃을 수 없는 예술은 없기에 이와 같은 생각은 사실 허상에 가깝다. 그러니 우리는 상처 입기 쉬운 것, 언제든 뜯기고 허물어져 무너져 내릴 수 있는 것에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 포장이 그림에 앞서야만 하듯, ‘상처 입을 수 있음’이 영원성에 앞서야만 한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황재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