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는 개헌론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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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사설 뜬금없는 개헌론 무엇인가 개헌논의 제기에 ‘경제불안·국론분열’ 우려했었는데

기사입력2016-10-24 15:51

중기이코노미 기자 (junggi@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예산안 전쟁도, 희대의 국정농단 의혹사건도 수면 아래로 들어갈 개연성이 커졌다. 야 3당이 줄기를 붙잡지 못하고 가지에 흔들린다면, 개헌론은 말그대로 ‘블랙홀’이 될 수 있다. 개헌론이란 블랙홀을 목전에 둔 한국사회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가. 조선일보 오늘자 1면 머릿기사의 제목은 ‘국민 90% “한국 경제 위기상황”’이다. 이 신문은 최근 ‘길 잃은 한국 경제’라는 주제로 6회에 걸쳐 관련 기사를 연재했다. 기획기사의 주요 내용은 기업구조조정, 가계부채 및 부동산투기, 중장기적인 재정운영 방안 등 한국경제의 뇌관 전반을 다뤘다. 한국경제의 현주소를 ‘위기’ 또는 ‘위기징후’라고 진단하는 매체는 조선일보만이 아니다. 위기극복에 대안과 각론은 제각각이지만 보수 또는 개혁, 좌우를 떠나 대한민국 경제가 위기라는 인식은 모두 공유하고 있다.

오늘은 대통령의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을 시작으로 400조원이 넘는 이른바 ‘슈퍼예산’에 대한 공청회, 부처별, 상임위원회별 심사 등 1개월여간에 걸친 예산안 레이스가 본격 시작하는 날이다.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기업구조조정 연착륙을 통한 산업생태계 재편과 함께 경제민주화를 위한 논의가 필요했다. 기업 편중의 분배구조를 개선해 가계소득을 증대시킴으로써 급증하는 가계부채를 해결하기 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해야 했다.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복지재정 확대를 위해 중장기적인 재정운영 방안을 확정해야 했다. 한국경제의 위기 또는 징후로 읽혀지는 이같은 현안들은 모두 돈의 문제다. 증세를 둘러싼 여야간 ‘전쟁’이 불가피한 예산안 국회가 예정돼 있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뜬금없다’고 단언할 수밖에 없다. 나아가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의 처신으로 보기엔 ‘무책임하다’고 비판할 수밖에 없다. 오늘 느닷없는 발표 이전 박 대통령이 개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정권의 핵과 미사일 위협 하에서 ‘난무하는 비방과 근거없는 의혹 제기’를 중단하라며 국론분열을 우려했던 정부다. 그런 정부가 이제 개헌론을 제기함으로써 여의도 정치권을 포함 국민 모두에게 사분오열할 것을 조장하고 있다. 국정 최고 책임자를 대상으로 ‘무책임하다’고 비판하는 이유다.

정세균 국회의장이 지난 6월 개헌논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에 대해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대통령의 입장이 바뀌거나 달라진 것은 없다”고 못박았다. 여기서 대통령의 입장이란 지난 4월26일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오찬간담회에서 밝혔던 개헌에 대한 반대발언을 말한다. 당시 박 대통령은 “경제를 살려서 국민이 그 부분에 있어서 체감하게 하고 그 뒤에 공감대를 형성해서 이걸(개헌) 좀 하더라도 해야 한다”며 “지금 이 상태에서 개헌을 하게 되면 경제는 어떻게 살리냐”고 되물은 바 있다.

박 대통령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 4월과 6월 이후 ‘경제를 살려서 국민들이 체감하고 공감’해서 지금 이 시점에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또 ‘당시에는 개헌을 하면 경제를 살릴 수 없었는데 지금은 개헌을 하면서도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묘책을 발견했는지’ 이 질문에 답을 줘야 한다. 박 대통령의 개헌론 주장이 일말의 진정성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박 대통령의 인식과 달리 지난 4월과 6월 이후 한국경제의 위기 징후는 더 많아지고 심각해졌다. 수출과 내수침체는 그 끝을 모른채 나락으로 가고 있고, 재정투입에 의한 정부의 단기부양정책으로 그마나 2%대 성장을 유지하고 있다. 2%대 성장조차도 경기회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부동산정책을 제외하면 1%대 성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가계부채 급증을 틀어막느라 애꿎은 서민들만 제2금융권을 기웃거리고 있다. 정부의 콘트롤타워 부재로 해운업 구조조정은 물류대란을 가져왔다. 지난 19일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격주에 한번 하던 경제관계장관회의를 매주 하겠다는 것도 이같은 위기 인식에 따른 것이다. 대통령과 경제부총리 모두 경제를 살리겠다고 말하지만 하는 행태는 제각각이다.

박 대통령이 개헌을 주장하며 제시한 개헌필요성에 대한 근거들은 개헌 그 자체에 대한 동의여부를 떠나 수긍이 가는 것도 있다. 또 개헌이 국민적인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당위론 역시 토를 달 이유는 없다. 다만 지금의 ‘국론분열’ 현상의 원인이 헌법 때문이라는 대통령의 진단과 인식에는 동의할 수 없다. 끊임없이 정쟁거리를 제공한 것이 대통령과 정부·여당이고, 그에 대한 야당과 시민사회의 요구를 외면함으로써 불통에 불통이 더해져 지금의 국론분열이 벌어진 것이다. 또 개헌주장의 근거로 대통령 자신의 대선 공약이라고 밝힌 것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는 주관적인 판단의 여지가 있으니 제외하자. 기초노령연금, 무상보육, 초등학생 온종일 돌봄, 4대중증질환 비급여 부담, 반값등록금, 고교무상교육 등의 공약은 아예 없어졌거나 당초 원안과 달리 시행되고 있다.

기로에 섰다. 여소야대라곤 하지만 불안정한 지형이다. 단일한 대오의 대여전선은 구축되지 못했다. 당리당략, 계파, 대선주자급 정치인 개개인의 이해에 따라 정치지형이 요동칠 가능성은 농후하다. 제1야당을 견제하기 위한 제3지대론은 그 내용도, 그에 참여하는 정치인들의 속내도 불분명하다. 박 대통령의 개헌론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틈새가 열렸다는 얘기다. 1%에 집중된 부를 나머지 99%에 나눠 줄 수 있는 정치인, 대기업의 횡포에 맞서 중소기업의 생존을 걱정하는 정치인, 비정규직의 아픔을 치유해 줄 수 있는 정치인이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