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문화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회생시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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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사설 사문화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회생시켜라 中企단체 소 제기, 공정위 전속고발권 폐지, 국민참여재판제 도입

기사입력2017-04-06 19:20

중기이코노미 기자 (junggi@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더불어민주당 김경협·민병두 의원실 주관으로 지난 5일 열린 ‘갑질타파’을 위한 개혁입법 발표회에서는 재벌대기업의 ‘갑질’사례가 소개됐다. LG전자가 하청업체에 부당하게 납품단가 인하를 요구했고, 삼성전자는 28년간 거래했던 협력기업의 금형을 다른 회사로 빼돌리는 기술탈취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 GS건설은 수급업체에 계약내용과 다른 공법으로 시공하도록 요구했음에도 시공방법 변경에 따른 적정대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롯데마트는 단가후려치기, 물류비용 부당전가, 자문수수료 부당공제, 계약조건 부당변경 등 각종 불공정행위 종합세트까지 선보였다.

지면이 부족하고 자판을 치는 손가락이 아플 뿐이지, 중소기업에 대한 대기업의 불공정행위는 차고 넘친다. 그리고 대기업의 갑질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지배주주 일가의 끝 모를 탐욕이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공정한 시장경제를 조성하기 위해서라도 대기업의 탐욕을 차단할 수 있는 제도마련이 필요하다는 해법 또한 국민적 동의를 받았다. 이번 대선에 나선 유력후보 대다수가 중소기업의 애로를 얘기하고, 대기업의 갑질을 근절하겠다는 공약을 잇따라 제시하는 배경이다.

명백하게 불법행위인 갑질 유혹에서 대기업이 벗어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갑질이 적발됐을 때 받는 불이익보다 갑질로 얻는 이익이 더 크기 때문이다. 갑질의 원인을 알았다면, 의외로 해법은 간단할 수 있다. 갑질에 대해 철퇴를 가함으로써, 대기업이 다시는 불법행위를 행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면 된다. 강력범죄자에 대한 엄격한 형사처벌이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국민은 없다. 마찬가지로 시장에서의 우월적 지위를 악용해 약자에게 행한 경제범죄에 대한 처벌 역시 경제정의 실현 차원에서 단호하고 엄중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김경협·민병두 의원실 주관으로 지난 5일 열린 ‘갑질타파’을 위한 개혁입법 발표회. ©중기이코노미

현실은 어떠한가. 대기법의 불공정행위에 대한 단죄 방안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징벌적 손해배상제다. 특정 기업이 갑질을 통해 얻은 수익이 있다면, 제재수단으로써 그 수익의 10배 또는 그 이상의 손해배상금을 부담시키는 제도다. 현행 ‘하도급거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원사업자의 불공정거래 등 법률위반행위로 인해 수급업자에게 손해가 발생한 경우 손해액의 3배 범위 이내에서 배상하도록 하고 있다.

문제는 수직·종속적인 원하청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계약관계를 유지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을’의 입장에서 ‘갑’의 불공정행위를 처벌해 달라고 법원에 가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 2011년 하도급법에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된 이후 대기업을 상대로 중소기업이 소송을 제기한 경우는 단 1건에 불과하다. 2015년 7월 한 중소기업이 CJ대한통운에 대해 부당하게 위탁계약을 취소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1심에서 패소했다. 결국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법문상으론 존재하지만, 단 한번도 손해배상 판결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사문화됐다는 얘기다.

죽은 법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하도급관계에서 수급사업자가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예컨대 대기업의 불공정행위에 대해 피해 중소기업을 대신해 소를 제기할 수 있는 당사자적격을 중소기업중앙회 또는 중기단체에 부여하는 방법이 있다. 보다 확실한 대안으론 공정거래위원회의 독점적 권한인 전속고발권을 폐지하고, 피해 중소기업과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모든 사람 또는 법인에 당자사적격을 줄 수 있다. 어떤 방식을 통해서든 피해 중소기업이 법원의 문턱을 쉽게 넘을 수 있는 장치가 없다면, 사문화된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회생시킬 방법은 없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불공정행위에 맞서 용기를 내고, 법원의 문턱을 넘어 법정에 들어간 경우에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우리나라 법원은 불공정행위와 손해발생 사이의 인과관계 및 손해배상의 범위를 소극적으로 인정하고 있어, 이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즉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법 위반자에 대한 처벌을 통해 불공정행위를 예방하자는 것인데, 법원이 소극적으로 판단한다면 제도도입 취지 자체가 무색해진다는 비판이다. 법원의 소극적 판단에 대한 대안으로 거론되는 것이 불공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사건에 국민참여재판제를 도입하는 것이다.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피해 중소기업에는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손해배상이 이뤄지도록 할 수 있고,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 역시 높일 수 있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아울러 징벌적 손해배상금의 한도가 3배 이내로 제한된 것도 입법취지를 반감시킨다는 지적도 많다. 손해배상의 범위를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현행 법원의 속성상 ‘3배 이내’의 징벌수준으론 대기업의 갑질 억제효과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범죄행위를 예방하기 위해 100배 또는 그 이상의 배상을 부과해도 법과 정의의 관념에서 결코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대기업의 무한 탐욕에 따른 폭주를 그대로 방치해서는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시장경제를 바로 잡을 수 없다. 공정한 시장경제를 조성한다는 측면에서도 제재가 필요하지만, 정의로운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 기회의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징벌적 제재가 요구된다.

돈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대기업이 시장을 독점하고, 뛰어난 기술력과 인적자원을 보유한 중소기업이 가져야 할 기회를 박탈하는 갑질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국가권력을 사유화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민들의 심판을 받아 대통령직에서 내려왔다. 시장권력을 독점한 대기업 역시 자신의 권력을 분점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의 심판을 통해 빼앗을 수밖에 없다. 정의롭지 못하다면 법과 제도를 통해 강제하겠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5월9일 출범하는 차기 정권이 국정과제 최우선순위로 삼아야 할 경제민주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