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좋아 기술탈취지, 도둑질이 아니고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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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파트너 ㅣ 대기업·공기업 “말이 좋아 기술탈취지, 도둑질이 아니고 뭔가” 中企 기술탈취 행태 ‘천태만상’…448건(2012)→ 528건(2016)

기사입력2018-08-24 11:37

채민선 기자 (iscra79@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23일 더불어민주당 송갑석 의원과 민변, 참여연대가 주최한 ‘대기업의 기술탈취·기술편취 피해사례 발표 및 근절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썬에어로시스, 삼영기계, 더치트, 짚코드 등 중소기업이 대기업 혹은 공공기관으로부터 기술탈취를 경험한 사례를 성토했다. ©중기이코노미

“말이 좋아 기술탈취지, 사실상 도둑질이 아니고 뭔가.”

더불어민주당 송갑석 의원과 민변, 참여연대가 주최한 23일 ‘대기업의 기술탈취·기술편취 피해사례 발표 및 근절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한 참석자는 대기업의 기술탈취·편취 행위에 대해 이렇게 일갈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썬에어로시스, 짚코드 등 중소기업이 대기업 혹은 공공기관에게 기술탈취를 당한 사례가 소개됐다.

‘기술탈취(편취)의 유형과 근절대책’ 발제를 맡은 김남근 변호사(민변 부회장)은 “대기업은 하청종속관계에 편입된 중소기업 기술을 기술의 규격화, 이원화(다변화) 등의 명목으로, 다른 하청중소기업에게 넘겨 납품단가를 낮추는 정책을 당연시 해왔다”며 “어찌보면 수출대기업 스스로 선진국 대기업의 기술을 모방하는 행위를 통해 경쟁력을 쌓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 중소기업 기술을 모방해 사용하는 행위를 위법하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부족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기술유출 범죄…2012년 448건에서 2016년 528건, 18% 증가

중소벤처기업부와 대중소기업농어업협력재단이 올해 1월 실시한 ‘2017 중소기업 기술보호 수준 실태조사’에 따르면 기업부설연구소를 보유한 중소기업의 14.3%는 거래기업(대기업 등)으로부터 중요한 기술자료 제공을 요구받은 경험이 있다. 기술유출 범죄는 2012년 448건에서 2016년 528건으로 계속 증가했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대기업의 기술탈취 행위는 일정한 패턴, 비슷한 유형을 보인다. 주요 기술탈취 유형은 ▲‘승인도’ 등을 명목으로 기술자료 요구 ▲품질관리, 국가기관 검사 등 기술자료 요구의 명분 ▲이원화(다원화), 규격화를 이유로 제공받은 기술 유용 ▲재계약시 단가인하 목적으로 기술자료 요구 ▲샘플을 제공 받은 후 제3업체에게 복제품 생산 의뢰 ▲공공기관이 행정혁신 사업에서 민간기술 모방 등이다.

<그래픽=채민선 기자> ©중기이코노미

◇‘승인도’ 등을 명목으로 기술자료 요구=승인도는 하도급사가 작성하는 도면으로, 원사업자가 위탁한 제품이 위탁한대로 제조될 수 있는지 여부를 사전에 확인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다. 승인도라고 해서 기술자료로서 정보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며, 해당제품의 제조방법에 관한 내용이 망라돼 있다.

현대로템은 6축 구동장치 개발과정에서 하도급사 썬에어로시스에게 소스코드와 수백장의 세부설계도면 자료를 요구했다. 자료를 제출하지 않으면 납품이 불가하다고 통보해 썬에어로시스는 이를 거절할 수 없었다. 현대로템은 2차 양산과정에서 에어로시스로부터 확보한 세부도면을 다른 중소기업에게 공개해, 그 세부도면을 기초로 입찰에 응하도록 해 낮은 단가로 입찰하도록 했다.

하도급법 제12호의3 제3항과 공정거래위원회 기술유용심사지침은 ‘원사업자가 부품 승인과정에서 수급사업자로부터 공정도, 회로도 등 기술자료를 넘겨받아 납품가격을 경쟁시키기 위해 수급사업자의 경쟁회사에 그 기술을 제공하는 경우’를 기술유용의 대표적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품질관리, 국가기관 검사 등 기술자료 요구의 명분=대기업들은 품질관리, 유지관리 등을 명목으로 기술자료 제출을 요구한다. 국가기관 검사 등을 이유로 기술자료를 요구하기도 한다.

중소기업중앙회가 8월 중소하도급사를 대상으로 한 ‘기술탈취 실태 파악을 위한 심층조사’에 따르면 한 원사업자는 미생물을 이용해 폐 페인트를 정화하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폐 폐인트를 처리해주는 하도급사에게 악취가 난다는 이유로 기술자료를 요구해, 습득한 기술로 유사 특허를 등록했다.

하도급법 제12조의3에 따른 공정거래위원회 ‘기술유용 심사지침’은 원사업자가 기술지도·품질관리 명목으로 물품의 제조공법을 수급사업자로부터 습득한 후, 자신이 직접 생산하거나 제3자에게 수급사업자의 제조공법을 전수해 납품하도록 하는 경우를 대표적인 기술자료 유용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기술자료 요구에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원사업자는 수급사업자에게 반드시 서면으로 요구해야한다.

◇이원화, 규격화 등 경영방침에 따라 요구된 기술탈취 유용=원사업자 대부분이 특정 하도급사 기술에 의존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기술의 규격화, 이원화 방침을 추진한다. 이원화 등을 이유로 중소기업 기술을 확보해 제3의 중소기업에 유출하고, 그 중소기업으로 하여금 10%이상 낮은 가격으로 생산해 납품하도록 하는 사례가 많다.

두산인프라코어는 하도급사 이노코퍼레이션에게 에어컴프레서 모델별 제작도면을 요구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승인도라는 명목으로 제작도면 11장을 제출받고, 제3의 업체에게 넘겨 제작하도록 했지만 기술자료가 부족하자, 추가로 도면 20장을 받아 제3의 업체에게 제품을 개발하도록 해 납품단가를 낮추는데 활용했다.

김남근 변호사는 “이제는 중소기업의 기술을 보호해 중소기업의 기술경쟁력을 높여 대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세계시장에 진출해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하는 정책이 국정과제가 돼야한다”고 강조했다. ©중기이코노미

◇재계약시 단가인하 목적으로 기술자료 요구=대기업이 처음 하도급계약을 할 때는 하도급사 기술이나 제품의 가치를 인정해 정상적인 납품단가를 정한다. 그러나 재계약 과정에서 기술자료를 요구해 확보하고, 기술자료를 이용해 납품단가를 인하하거나, 이에 응하지 않으면 거래를 거절하는 사례가 많이 나타난다.

중기중앙회 기술탈취 피해사례 심층조사 인터뷰에 따르면 한 원사업자는 플랜트설비 열처리·내화물시공 기술을 가진 하도급사와 재계약을 하면서 기술자료를 요구했고. 납품단가를 최초 계약보다 30% 인하했다. 나아가 기존 납품가격이 과다했다며 소급해 납품가격을 반환하라는 요구까지 했다.

납품물량을 확보한 하도급사는 재계약시 종전 납품물량을 계속 확보하려고 한다. 원사업자가 이를 이용해 기술자료를 요구하고, 이를 다른 중소기업에 넘겨 거래처를 대체한다는 압박을 통해 납품단가 인하를 강요하는 것이다.

◇샘플을 제공 받은 후 제3업체에게 복제품 생산 의뢰=대기업이 중소기업으로부터 받은 샘플을 이용해 다른 업체에 복제품을 생산하도록 하는 사례도 있다. 또 중소기업과 계약을 체결해 장비 샘플을 제작하도록 한 후 독자개발을 하는 경우도 보인다. 이외 거래중인 중소기업과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한 후 동일한 기능의 제품을 개발하는 사례도 자주 발견된다

(주)테크마레는 대형선박 건조를 위한 블록 제작과정에서 블록손상을 최소화하는 기술을 개발해 특허를 출원했다. 테크마레는 2012년 현대중공업의 자료요청에 따라 산업재산권 출원 사실을 명기해 자료를 제출했고 샘플도 제공했다. 그 뒤 현대중공업은 테크마레가 제출한 샘플을 제3의 업체에 제공해 복제품을 생산하도록 했다.

◇공공기관이 행정혁신 사업에서 민간기술 모방=박근혜 정부는 2013년 ‘공공기관 합리화 정책방향’을 발표하며, 공공기관으로 하여금 대국민 서비스를 개선하기 위한 혁신방안을 마련하라고 했다. 이에 각 공공기관은 빠른 시간내에 대국민 서비스 실적을 올리기 위해 민간이 이미 개발한 기술을 모방해, 대국민 서비스 혁신 프로그램을 제출하는 공공기관들이 생겨났다.

금융감독원과 짚코드 사건은 공공기관이 민간기술을 모방한 대표적인 사례다. 금융감독원은 2015년 5월 주소 일괄변경 서비스 시행을 예고했다. 그러나 주소 일괄변경 서비스는 이미 민간기업 짚코드가 개발해 대형유통점 등 일반기업 뿐 아니라 보험회사, 은행 등 금융기관에 제공하는 상태였다. 짚코드의 구승모 대표는 “금감원의 주소일괄변경시스템 시행예고를 듣고 제휴사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제휴사들은 ‘금감원이 제시한 서비스를 시행하지 않을 경우 감사를 하겠다 해서 을의 입장에서 참여할 수 밖에 없다. 금감원이 주소변경서비스를 시행하면 짚코드의 서비스를 이용하기 힘들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다”고 주장했다.

김남근 변호사는 “대기업의 기술탈취·편취 행위가 중소기업의 기술개발 의욕을 꺾고, 대기업이 주는 납품물량에 의존해 오로지 가격경쟁만을 하도록 해 중소기업의 경쟁력을 전반적으로 떨어뜨렸다”고 비판했다. 이어 “이제는 중소기업 기술을 보호해 중소기업 기술경쟁력을 높여, 대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세계시장에 진출해 경쟁력을 확보하도록 하는 정책이 국정과제가 돼야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