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입맛에 맞게 기업도 바꾸려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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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사설 정권 입맛에 맞게 기업도 바꾸려 했나 CJ그룹에 대한 청와대 요구…상상하기 어려운 전근대적 행태

기사입력2016-11-07 17:55

중기이코노미 기자 (junggi@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진실은 잠시 덮을 수 있지만 영원히 덮을 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사실 이 얘기는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는 도덕적인 관념,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는 양심의 목소리를 표현한 바람일 뿐이다. 진실은 그것을 찾고자 하는 부단한 탐구와 조사, 용기있는 행동이 전제될 때 그 일말의 부분만을 드러내 보여준다. 지난 5일 광화문을 포함해 전국 주요 도시의 깊은 밤, 수십만개의 촛불은 진실을 찾고자 한 국민들의 움직임이다.

지난해 7월 24~25일 박근혜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들 간의 비공개면담 경위에 대해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검찰이 들여다봐야 할 대목은 박 대통령이 이들 기업총수들과 만나서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금을 요청 또는 강요했는가 여부다. 당시 비공개면담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등 7명이 참석했다. 비공개면담은 1년 이상 묻혔다가 최근 미르·K스포츠재단 강제모금 사건 관련 안종범 청와대 전 정책조정수석에 대한 검찰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박 대통령과 이들 7개 기업총수가 나눴던 대화내용을 검찰이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기업총수들이 스스로 고백하거나, 비공개면담을 기록한 문서가 나오기 전에는 ‘진실’을 밝혀내긴 어렵다는 얘기다. 기업총수 이외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를 통해 검찰이 간접증거인 조각파편을 모아 퍼즐을 맞출 수 있을 것이라 믿는 국민은 없다. 살아있는 권력에 칼 끝을 겨누지 못하는 검찰의 속성을 고려한다면 진실의 문을 넘기 위해 더 많은 국민들이, 더 오랫동안 촛불을 들어야 할지 모른다.

또 다시 촛불을 들어야 하고, 들 수밖에 없는 추악한 진실 하나가 추가됐다. 비공개면담에 참석했던 7개 모든 기업총수들과 박 대통령 사이에 오갔던 대화내용을 유추할 수 있는 단초가 최근 언론에 공개된 것이다. 종편 MBN이 지난 4일 보도한 녹취록에 따르면, 2013년말 당시 청와대 조원동 경제수석비서관은 CJ그룹 손경식 회장에게 전화해서 이미경 부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도록 종용했다. 녹취록에서 조 전 경제수석은 “너무 늦으면 저희가 난리가 난다. 지금도 늦었을지 모른다”, “그냥 쉬라는데요. 그 이상 뭐가 더 필요한가. 중간에서 확실하게 전달해 드렸다” 등의 발언을 했다. 또 조 전 수석은 자신의 요구가 대통령의 뜻이라는 취지의 발언과 함께 “CJ가 건강하게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뜻”이고 “수사까지 안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라는 협박성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미경 부회장은 다음해인 2014년 10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떠났다.

또 같은 날 SBS 보도에 따르면, CJ그룹의 한 고위인사는 조 수석이 2013년 7월 손 회장에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에서 물러나라고 압력을 가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조 전 수석은 당시 “대통령의 뜻”이라는 말도 덧붙였다는 것이다. 손 회장은 2013년 7월 임기가 2년 넘게 남은 상황에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CJ그룹이 어떤 이유로 미운털이 박혀 기업총수 및 경제단체장 퇴진 요구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이유가 무엇이든 청와대 경제수석까지 나서 대통령의 뜻 운운하며 경영에서 손을 떼도록 강요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옥스포드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그리고 정책학박사까지 받은 경제학자인 조 수석이 기업의 총수, 임원을 선출하는 상법을 모를 수 없다. 경제단체장은 그렇다고 쳐도 박근혜 정부가 기업총수 교체를 결정할 만큼 회사지분을 갖고 있지 않고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최순실 사건과 맞물려 하루가 멀다하고 조금씩 새어나오는 권력남용과 부정부패, 범죄행위들은 민주공화국 국민으로서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전근대적인 행태를 띠고있다. 내용적으로 좀 모자라더라도 형식적인 민주주의 외관은 갖추고 있다고 믿었던 국민의 시대인식 자체가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 3년 반의 시간 동안 언론 및 SNS 통제, 국정교과서 강행, 노동기본권 박탈 등을 통해 민주주의 질서는 붕괴됐다. 나아가 한국사회를 쥐락펴락하는 재벌기업의 약점을 잡아 이른바 자유경제질서마저 정권이 입맛에 맞게 재편하고자 했다.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에서 전체주의 국가로 바꾸고자 했던 것인지 의문까지 들게 한다.

‘민주주의란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말이 있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이 했던 얘기가 잘못 번역된 것이라 한다. 오역 여부와 무관하게 이 말은 한국사회 현대사, 특히 민주주의와 관련해 가장 매칭이 잘 된 문장임에는 분명하다. 얼마나 더 많은 촛불이 필요한 것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묻고 싶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