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대통령, 재벌개혁 포기했다고 솔직히 말해야

프린트

오피니언 ㅣ 사설 文대통령, 재벌개혁 포기했다고 솔직히 말해야 더 이상의 희망고문, 대통령을 사랑했던 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기사입력2019-01-03 17:06

중기이코노미 기자 (junggi@junggi.co.kr) ㅣ다른기사보기

“심각한 양극화와 경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소득주도성장으로 경제정책 기조와 큰 틀을 바꿔내는 일이 결코 한순간에 이뤄질 수 없음도, 처음 가는 길이라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음도, 그러나 이는 반드시 해내야 할 시대적 사명임도, 적극 이해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2일 발표한 신년사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대변인이 한 브리핑 내용 중 일부다. ‘경제정책의 기조와 큰 틀을 바꾸는 일’,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는 처음 가는 길’이란 구절은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직접 밝힌 표현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신년사 어느 구석에도 ‘큰 틀을 바꿔내고 처음 가는 길’이 ‘소득주도성장’임을 명시한 대목은 없다. 이 대변인의 발언은 대통령 신년사에 대한 주석인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2019 기해년 신년회에서 신년인사를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한편으론 이해가 간다. 지난 1년내내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주류인 극우 언론 및 야당으로부터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은게 소득주도성장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정면돌파 대신 논란을 자초하지 않는 길을 선택했고, 그 길이 소득주도성장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다면, 이재정 대변인의 해석은 정확한 것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의 신년사를 꼼꼼히 읽어보면, 이 대변인이 대통령의 진의를 오독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 대통령의 머릿속엔 소득주도성장이란 개념이 존재할지 몰라도, 그것을 정책으로 집행하겠다는 의지는 전혀 없다. 대통령의 신년사 전체를 관통하는 경제관은 ‘(노동자 또는 가계) 소득주도성장’이 아닌 ‘(기업) 이윤주도성장’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신년사에서 노동자는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 양보와 고통분담’의 당사자로만 등장한다. 반면 데이터·인공지능·수소경제·스마트공장·자율주행차 등 신산업을 주도하는 재벌대기업에겐 무한지원을 약속했다. 중소기업을 얘기했고 자영업자 지원책도 언급했지만, 정작 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몬 불공정한 산업생태계를 바로잡겠다는 일언반구도 없다.

대통령은 “우리는 작년 사상 최초로 수출 6000억불을 달성하고, 국민소득 3만불시대를 열었다”며 자부심을 가지라 했다. 공허한 소리다. 대통령 스스로 신년사에 말했지 않은가. “나라 경제가 좋아지고, 기업은 성장하는데, 왜 내 삶은 나아지지 않는지 힘들어 하기도 했다”고. 과거형이 아니라 지금도 99% 서민의 삶은 고통스럽다. ‘국민소득 3만불시대’에 9000원도 채 안되는 최저임금에 온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드는 경제단체, 극우·보수 언론 및 야당에 분노한다. 여기에 부화뇌동 확정된 최저임금마저 깎고, 노동시간단축법안조차 무력화한 집권여당과 정부의 무능한 정치력에 화를 참지 못하겠다.

대통령이 성장을 얘기하고 숫자를 말했다. 이 땅에서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노동자의 절실한 요구는 최저임금 1만원이지 성장이 아니다. 중소기업 사장님의 바람은 최저임금 지불여력을 보장하는 공정한 산업생태계지 성장률 수치가 아니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 또한 대기업과 건물주의 끝모를 탐욕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달라는 것이지, 재벌대기업 곳간만을 채우는 양적 성장이 아니다.

“왜 또 내일을 기다려야하느냐는 뼈아픈 목소리도 들린다고.” 문재인 대통령이 말했다. 불통의 대명사인 전 대통령 박근혜를 국민이 힘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주택·땅 부자가 아닌, 재벌대기업이 아닌 서민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약속과 함께 정치인 문재인이 대통령직에 올랐다. 이후 촛불혁명 주역과 모든 서민은 대통령이 자신들의 삶을 바꿔줄 것이라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서민들의 ‘뼈아픈 목소리’를 외면하고, 또다시 내일을 기다리란다. 재벌대기업 민원은 그리도 잘 들어주면서.

대통령은 기업의 혁신을 얘기했고, 새로운 산업정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재벌대기업이 독과점이윤을 철저히 보장하는 수탈적 원하청구조를 스스로 깨고 혁신할 이유는 단 한가지도 없다. 수급기업을 쥐어짜면 쉽게 돈이 되는데, 이들에게 온갖 리스크를 감내하고 투자하라는 요구 자체가 모순이다. 제일모직 가치를 뻥튀기하고, 보험가입자 돈을 이용해 삼정전자를 가질 수 있고, 그것을 정부가 보장해주는데, 이재용에게 무슨 혁신이 필요한가. 현대차 위기론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닌데, 11조원을 들여 매입한 한전부지에 105층짜리 신사옥을 짓겠다는 정몽구다. 현대차에게 정부가 먼저 부동산임대업을 보장하겠다고 약속까지 한 마당에, 무슨 산업정책을 펴겠다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람도 그렇고 기업의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검증된 방법은 혁신을 촉진하고 보상하는 생태계 구축이다. 노동시장에선 일한 만큼 대가가 보장되는 보상체계가 가동돼야 하고, 생산물시장에선 공정한 룰이 작동해야 한다. 최저임금만으로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될 수 있어야 하고 비정규직과 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극심한 임금격차는 해소돼야 한다. 재벌대기업의 관행화된 불공정거래는 철퇴를 맞아야 하고,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겐 적정 이윤을 보장할 공정경제가 선행돼야 한다.

“국가는 평범한 국민들이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의 오늘이 행복할 수 있도록 해내겠다.” 대통령이 신년사를 마무리하면서 한 말이다. ‘왜 또 내일을 기다려야하느냐는 뼈아픈 목소리’를 대통령이 가슴으로 들어주길 바란다. 그리고 내일이 아닌 오늘 완전히 행복할 순 없을지라도, 내일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국가의 의무를 이행해 주길 바란다. 그 시작은 대통령과 재벌기업 총수들 간 회동이 아니라 故 김용균 발전노동자의 동료인 비정규직과의 만남이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제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재벌개혁을 포기했다고. 소득주도성장 역시 기득권세력의 저항으로 사실상 폐기했다고. 공정경제를 통해 다함께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어렵게 됐다고. 더 이상의 희망고문은 문재인 대통령을 사랑했던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통령의 선의를 신뢰하는 다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당시 새겼던 초심으로 돌아가길 고대한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더불어 함께 잘사는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달라고 기원한다는 사실도 기억해 주시길 당부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