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 슈퍼마리오, 악기로 보이는 작품명 ‘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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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파이프, 슈퍼마리오, 악기로 보이는 작품명 ‘핵’ 힘의 근원을 찾아서…이승조

기사입력2020-09-13 10:00

김태현 미술평론가 (elizabeth0711@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핵 83-10’, 1983, 캔버스에 유채, 53×65cm. 유족소장

1945년 미국의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되고 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원자폭탄의 힘은 전쟁이 가지고 있는 미움과 증오 그리고 자본의 논리를 거스를 만큼 인간에게 잔혹한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인류 최악의 무기인 핵의 위력을 알게 된 강대국들은 너나할 것 없이 원자폭탄 개발에 열을 올렸고, 결국 핵무기 개발에 성공한 국가들은 더 이상의 확산을 막기 위한 조약을 체결하기까지 이른다.

대한민국 역시 핵무기 개발에 열을 올리던 시기가 있었다고도 전해지며, 오늘날 북한과의 핵문제는 마주하고 있는 난제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핵이 예술이 된다면=핵문제는 1945년 이후 오늘날까지 세계 각국에서 여러 가지 현상을 보이고 있다. 정치적인 대결부터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국가들도 과열된 모습을 가지고 무기개발에 열을 올렸는가 하면,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의 폭발사고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방사능에 노출되는 피해를 입어 현장 사망자 이외에도 암환자가 급증하는 부작용을 발생시켰으며 오늘날까지 그 아픔은 지속되고 있다.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 역시 마찬가지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인류의 커다란 재난 상황이다.

하지만 전쟁이 아닌 사소한 실수로 시작된 이러한 비극을 경험하고서라도 또 이의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우리가 원자력 기술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가 있기는 하다. 핵이 분열되며 생겨나는 막대한 에너지로 전기를 저렴한 가격에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됐고, 나아가 IT로 대표되는 전기에 의한 20세기 이후의 수많은 문명의 이기가 탄생할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이다.

◇이승조와 한국미술=1960년대의 한국미술은 세계 미술계에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시기다. 한국전쟁 후 1950년대의 국가 재건기를 지나 60년대 사회가 안정을 찾기 시작하면서, 미술가들도 국내를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 시발점으로 꼽히는, 1963년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해 프랑스 언론에 보도된 박서보의 ‘원형질’은 국내의 미술가들에게 큰 귀감을 얻어 해외진출을 열망하게 했다. 당시 젊은 미술가들은 일본과 미국의 잡지로만 접하던 미술에서 나아가 직접 프랑스와 미국으로 유학 혹은 이주해 세계미술 현장을 직접 목도하고, 그들과 경쟁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당시 세계의 미술계는 단순한 재현을 넘어 회화가 지닐 수 있는 본질에 고민을 하고 있었으며, 또 작품의 발전을 위해 철학적인 의미를 더하기도 했다. 이러한 시기에 미술활동을 시작한 이승조는 이러한 한국 미술계 내에서 파이프를 연상시키는 그림으로 자신의 화업을 완성시킨 미술가다.

일정한 음영을 지니고 반복되는 구성 형태는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키며, 그의 이러한 미술작업은 1960년대 추상 표현주의를 지나 기술의 발전과정과 더불어 전개됐던 옵아트라는 장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승조가 처음으로 파이프의 형태감을 선보이기 시작한 것은 1967년이었다. 그 이후로 소재는 조금씩 달라지고 재료 역시 변화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그 중심에는 원통형이 있다.

작품을 선보였을 당시 가장 형태가 유사하고 흔한 소재가 파이프이기에 이승조는 ‘파이프 미술가’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 제목에서 유지하고 있는 ‘핵’으로 미루어보아 원자력기술에서 활용되는 원심분리기에서 원통형을 착안했을 가능성이 높다. 핵무기와 원자력발전 모두의 재료와 원료가 되는 우라늄을 분리농축하기 위해 필수적인 원심분리기의 원통형 관의 형태에서, 이승조는 핵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기인해 작품을 전개해 나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핵 PM-76’, 1969, 캔버스에 유채, 162×162cm. 유족소장

◇회화의 힘을 찾아서=이승조의 작품을 보면, 마치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한 듯 정교한 붓질로 채워진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교한 붓질은 단순한 공정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 기계로 그린 듯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스케치 후 마스킹 테이프를 캔버스에 부착을 하고 평붓으로 그어낸 후 사포질을 통해 붓질을 없애는 공정이 필요하다. 다소 단순한 형태에 비해 많은 수행적 행위을 포함하고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에 거부감 없이 이승조의 작업의 크기는 점점 확장돼 갔으며 색채는 흑과 백으로 단순해졌다. 또한 화면 구성도 기교를 부리기보다 힘이 느껴지도록 확실하게 드러났다. 이는 1970년대 한국 미술계와 활발히 교류하던 이우환의 영향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처럼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의 그림은 다양한 재료로 실험됐으며 시각적인 조형 실험도 병행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처음 파이프를 선보이기 시작한 그룹명인 ‘오리진’처럼 색과 조형의 근원으로 회귀해, 단순하지만 강렬한 회화로 그의 미술세계를 마무리했다.

◇확장하는 이승조의 미술=이승조는 옵아트의 개념 자체가 생소하던 한국 미술계에 처음으로 이를 시도한 미술가이자, 어떤 시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미술 신념을 중심에 두고 활동한 미술가다.

그의 평생 작품명이기도 한 ‘핵’이라는 키워드가 많은 과학적인 가능성을 내포한 기술인 듯 그의 그림 역시 간결한 형태로 다양한 사물을 연상시키게 하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 그라데이션 된 확실한 음영을 지닌 원통은 20세기 중반에는 파이프로 대변됐으며, 또 1980년대에 등장한 배관공 형제가 나오는 비디오 게임인 ‘슈퍼마리오’ 생각이 나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는 악기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전자 회로도와 같은 것을 연상시키게 한다.

이처럼 시대와 세대를 불문하고 그의 그림에서는 무엇을 연상할 수 있는 형태의 확장성이 있기에 앞으로도 계속 호출될 수 있다. 이것은 이승조의 미술에 내재돼 있는 견고하고 강력한 진정성의 힘 때문이다.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0월4일까지 이승조의 회고전 ‘도열하는 기둥’이 열리고 있다. 그의 미술을 통해 주변이 혼란스러운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자신에게 중요한 원동력이 되는가를 되돌아 볼 수 있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중기이코노미 객원=김태현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