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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시대착오의 기록은 또 하나의 기록이 돼 남을 것 두산갤러리는 소장품전 ‘마니에라’(2023)…영원한 현재와 시대착오

기사입력2025-12-11 16:23

황재민 미술평론가 (inthebox28@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마니에라(2023) 전시 전경.

2023년 11월 15일부터 12월 16일까지 두산갤러리는 소장품전 ‘마니에라’(2023)를 열었다. 두산갤러리가 처음 문을 연 2007년부터 2023년까지, 약 15년의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기획이었다. 전시에는 구동희, 권오상, 김인배, 박광수, 함진 등의 과거 작업이 놓여 있었다. 어디까지나 소장품전이기에 의도한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이 작가 목록은 그 자체로 한국 동시대 미술의 어떠한 층위를 잘라내어 보여주고 있었다.

전시의 제목인 ‘마니에라’는 ‘마니에리스모’의 원형으로, ‘매너리즘’으로 흔히 표기되는 역사적 양식을 지시한다. 매너리즘은 특유의 기이한 시각적 형태로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마니에라’는 마니에리스모의 미적 형태보다는 그것이 갖는 시간성에 주목했다. 마니에리스모는 오랫동안 유의미한 미술사적 양식으로 주목 받지 못했다. 앞선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보다 현저히 열등한 것으로, 고유한 이름을 가질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곤 했던 것이다. 마니에라는 미술사라는 학제에서 마니에리스모라는 이름을 부여 받지 못한, 어떤 유예된 시기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은 기획은 오늘날의 미술이 처한 처지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킨다. 두산갤러리가 문을 연 2007년이 금융 위기 직전 ‘동시대 미술’의 르네상스였다면, 2023년은 ‘동시대 미술’의 끝물에 가까운 시기다. 우리가 보고 있는 ‘동시대 미술’은 마니에리스모가 되지 못한 마니에라인 것일까? 소장품이 간직하고 있는 과거의 시간성을 불러들임으로 ‘마니에라’는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다.

일반적으로 동시대 미술은 1989년 이후의 미술을 칭한다. 공산주의 몰락과 글로벌 시장의 출현 등, 역사적 사건과 맞물려 하나의 ‘시대’가 나타났다고 진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대 구분은 정확한 것만은 아니었다. 1989년이라는 특정 시기는 지극히 서구의 관점에서만 중요한 시기였으며, 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와 같은 지역에서 벌어진 변화를 포착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동시대를 정의하기 위한 대안적 접근이 시도되었다. 이들은 동시대를 하나의 담론으로 보고자 했다. 담론적 접근은 크게 두 개의 경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동시대를 ‘영원한 현재’로 바라보는 접근이었다. 동시대란 과거도, 미래도 없이 현재만이 연속되는 시간이다. 아무런 사건도 벌어지지 않으며, 무언가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공통의 감각을 나눌 수 없는, 무한하게 지연되고 유예되는 상태에 가깝다. 동시대 이전의 모더니즘이 미래를 향하여 폭발적으로 진보하는 시간을 그려내었다면, 동시대 이후의 영원한 현재는 정적이고 지루한 시간을 나타낼 뿐이다.

이는 다소 허무주의적인 시각이다. 반면 또 하나의 접근은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이 이론화한 것이다. 아감벤은 동시대가 그 시기의 가장 어두운 곳에 존재하며, 빛을 향해 가지 않고 어둠을 향해 가는 사람만이 당도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보았다. 지배적 시간 감각에 파열을 일으키는, 시대착오라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시간이 즉 동시대라고 보았던 것이다. 오늘날의 시간이 영원히 침잠하고 유예되는 것이라면, 그 속에서 지배적인 감각을 따르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시대착오나 시기상조 등 지배적 시간과 불화하고 갈등하는 것만이 의미를 갖는다.

미술사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예술 작품이 언제나 시대착오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술 작품은 언제나 현재와 과거의 혼합체이며, 그것이 만들어진 ‘당대’가 아닌 또 다른 시간을 품는다는 것이다. 클레어 비숍은 이와 같은 관점을 이어받아, 동시대 미술을 전시하는 방법에 관한 대안적인 사유를 제시했다. 동시대 미술은 통상적으로 비엔날레와 같은 거대한 이벤트에서 나타나는 것이라 여겨진다. 전 세계 곳곳에서 매번 새로운 작품을 선별하여 그러모으는, 그러한 이벤트에서만 포착 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실제로 동시대 미술을 보여주는 동시대 미술관은 점차 거대해져 갔다. 마치 유예된 시간, 무한한 현재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처럼 거대한 크기와 새로운 작업이 필요하다는 듯이. 그러나 비숍은 디디-위베르만의 사유를 바탕으로, 동시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역사적 소장품을 보유한 미술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멈추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장품 선에서 오히려 예술 작품 속에 잠재된 시간의 다양성이 나타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더 거대해지고 더 빨라지고자 했던 동시대의 조급증은 마침 자본의 속도와 맞물렸다. 자본은 기억을 싫어한다. 잊어야 새로운 순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시대 미술은 그렇기에 잊고 또 잊는다. 과거를 뒤에 남겨두고 달아나며, 과거가 필요하다면 가짜 과거를 만들어내며 순환한다. 이때 과거의 작업을 꺼내어 다시 보여준다는 것, 이처럼 빠른 속도와 불화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시대착오의 위험성을 갖는다. ‘마니에라’는 2023년 한국의 동시대 미술을 2007년 한국의 동시대 미술과 비교하고, 마니에리스모의 시간성과 비교한다. 이 광범위한 시대착오의 기록은 또 하나의 기록이 되어 남을 것이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황재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