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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대의 인물이 돼버린 007과 전함 테메레르

지폐가 된 작품 그리고 예술가…윌리엄 터너㊤ 

기사입력2020-11-12 14:00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비평의 조건’ 저자)
007은 가장 오래된 영국의 첩보영화 시리즈다. 2012년에 개봉한 ‘007 스카이폴은 이 시리즈의 스물세 번째 작품으로 그 시작은 이렇다.

 

임무를 위해서 항공권과 위조된 여권을 받아야 했던 007 제임스 본드는 런던 내셔널 갤러리 34번 방 중앙에 있는 등받이 없는 긴 의자에 앉아 접선자 Q를 기다린다. 본드가 물끄러미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젊은 남자 Q가 본드 옆에 앉아서 똑같은 그림을 보면서 한때 잘 나갔던 배가 불명예스럽게 끌려가고 있잖아요. 시간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법인가 보죠?”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본드와 Q가 함께 바라본 그림은 바로 전함 테메레르(Fighting Temeraire, 1838~39)’. 불타는 듯한 석양빛과 싸늘한 푸른빛의 대기가 색채의 향연을 펼치고 있는 강물 위로 검고 묵직한 작은 배와 밝은 색의 큰 배가 떠 있는 그림.

 

이 작품은 1805년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를 격파한 전함 테메레르 호가 시간이 흐르면서 구시대의 유물로 전락해 해체되기 위해 작은 증기선에 끌려가는 장면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원제는 Fighting Temeraire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해체를 위해 예인되는 전함 테메레르라고 불리기도 한다.

 

윌리엄 터너, ‘전함 테메레르’, 1838-1839, 캔버스 위에 유채, 91×122cm,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 소장.

 

돛을 단 거대한 범선을 증기기관을 가진 작은 배가 검붉은 연기를 뿜으며 끌고 가는 모습은 새로운 기술과 산업혁명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이 ‘007 스카이폴에서 늙은 본드의 상황, 다시 말해서 전함 테메레르처럼 예전에는 굉장한 시절이 있었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는 구시대의 인물이 되어버린 본드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전함 테메레르는 태양이 저무는 시간이나 전체적인 그림의 색채가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거대한 범선을 애틋한 감정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007 시리즈에 등장할 정도로 이 그림을 영국인은 대단히 좋아한다. 가장 좋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BBC 라디오 4에서 1995년 이런 설문조사를 했다. “영국의 모든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은 무엇인가?” 그때 1위를 차지한 그림이 바로 전함 테메레르. 이 그림은 급기야 영국에서 유통되는 20파운드 지폐에 넣기로 결정해 올해 2월부터 전함 테메레르가 인쇄된 지폐가 사용되고 있다.

 

윌리엄 터너와 ‘전함 테메레르’가 인쇄된 20파운드 지폐.<출처=www.changechecker.org>
그러면 영국인은 이 그림을 그린 작가와는 별개로 이 그림만 좋아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 지폐에서 이 그림은 그저 들러리일 뿐이다. 이 지폐의 주인공은 바로 이 작품을 그린 화가 조셉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지폐의 모델을 바꾸기 위해 영국에서는 2016년 미술가와 조각가, 패션 디자이너, 사진가 등 총 590명의 예술가를 선별했고, 거기서 최종적으로 선정된 사람이 바로 윌리엄 터너다.

 

터너는 영국이 자랑하는 국민화가다. 영국에서는 매년 젊고 재능있는 미술가에게 주는 상이 있다. 바로 터너상(Turner Prize)’이다. 여기 후보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는 권위 있는 상이다. 이 상은 1984년부터 수여됐는데, 해를 거듭할수록 그 권위와 위상이 높아지면서 다른 나라 미술상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리나라에서도 매년 올해의 작가상을 수여하는데, 그 시작과 형태가 터너상의 영향이 물씬 풍긴다. ‘터너상이라는 명칭으로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 명칭은 바로 윌리엄 터너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영국의 제일 권위 있는 미술상에 터너라는 이름을 붙이고,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그의 작품을 뽑고, 지폐의 모델까지 됐으니,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라는 말이 과장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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