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붙는 소득보장정책은 기본소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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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ㅣ 칼럼 조건 붙는 소득보장정책은 기본소득이 아니다 하나뿐인 삶이 ‘창발적’이도록…기본소득 ‘무조건성’ ‘보편성’ 지향

기사입력2022-12-22 09:20

오준호 객원 기자 (munard@daum.net) ㅣ다른기사보기

오준호 기본소득당 공동대표·기본소득정책연구소장(‘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 저자)

“이름이란 뭘까요? 장미는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똑같이 향기로운 걸요.”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의 대사다. 자신이 사랑에 빠진 로미오가 원수 가문임을 알고 탄식하며 하는 말이다. 알다시피 이들은 상대의 이름에 상관하지 않고 불멸의 사랑으로 뛰어든다.

줄리엣에게 장미의 본질이자 장미와 다른 꽃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 향기다. 달리 말해 그 향기만 있다면 그 꽃을 ‘장미’라 부르든 ‘장마’라 부르든 중요하지 않다. 이를 기본소득에 적용해보자. 기본소득을 다른 제도나 아이디어와 구분하는 ‘향기’는 무엇인가? 무엇이 기본소득과 기본소득이 아닌 것을 결정적으로 나누는가?

기본소득은 ‘정치공동체가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개인 단위로 자산조사나 노동의무 부과 없이 지급하는 소득’이다. 기본소득 이론의 최고 석학 필리프 판 파레이스의 정의다. 한편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BIEN)는 기본소득을 ‘자산심사나 노동 요구 없이 무조건적으로 모두에게 개별적으로 주는 정기적인 현금’으로 정의한다.

기본소득을 정의하는 두 문장에서 알 수 있는 기본소득의 핵심 지향(志向)은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이다. 기본소득 지지자는 누구나 합의하는 지향이다. 조건 없이 주고, 모두에게 주고, 가구가 아니라 개인에게 준다. 여기에 ‘주기적으로, 충분한 액수를’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정기성, 충분성).

기본소득은 조건 없이 주고, 모두에게 주고, 가구가 아니라 개인에게 준다. 여기에 주기적으로, 충분한 액수를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이미지=이미지투데이>

기본소득의 ‘향기’는 무조건성이다. 무조건성은 기본소득의 핵심 지향 중에 핵심이며, 기본소득을 다른 사회보장제도와 구분하는 기준이다. 무조건성은 소득이나 자산 수준, 부양자, 노동능력, 경제활동 참여, 사회적 기여와 무관하게 소득을 제공한다는 뜻이다. 기본소득이 무조건적인 이유는 ‘최소한의 소득보장은 인권’이란 관점에 서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건이 붙는 소득보장정책은 기본소득이 아니다. 그런 정책에 기본소득이라 이름을 붙인다 해도 기본소득과 지향이 전혀 다른 정책이 된다.

예를 들면 ‘국민의힘 기본정책 1호 기본소득’이 그렇다. 2020년에 미래통합당이 국민의힘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국민이 기본소득을 통해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을 정책에 넣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도 자주 이걸 언급하면서 “국민의힘도 기본소득에 동의하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나 국민의힘도, 이재명 대표도 번지수가 틀렸다.

당시 정책을 주도한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이 내놓았던 ‘기본소득지원제도’는 중위소득 50%를 기준선으로 그 아래 저소득층 소득을 기준선까지 맞추도록 지원하는 내용이다. 기본소득의 요건에서 벗어난다는 비판에 윤 전 의원은 “훈고학(고전의 본뜻을 찾는 학문)을 하자는 것이냐”며 반발했다. 힘든 국민에게 소득을 지원하면 기본소득이지 뭘 따지냐는 식이다. 무조건성이 기본소득의 핵심임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국민의힘이 말하는 기본소득은 ‘부의 소득세’의 변형이며 토론할 가치가 있는 정책이다. 그러나 그것이 기본소득은 아니다. 장미와 향이 전혀 다른 홍어를 가져다 색이 비슷하니 장미라 우겨선 안 된다.

무조건성 다음으로 중요한 기본소득의 지향은 보편성이다. 보편성은 정치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 목표란 뜻이다. 기본소득의 보편성은 기존 복지국가론에서 가리키는 보편성과 다르다. 기존 복지국가론에서 보편성은 일단 위험에 처하면 누구든 도움을 받는다는 의미, 곧 ‘보편적 사후구제’다. 반면 기본소득은 ‘보편적 사전보장’이다. 위험이 오기 전 모두에게 구명조끼를 주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보편성은 사각지대와 선별의 낙인이 없는 것이 장점이다. 보편성을 극대화하면 ‘지구 기본소득’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 사회정책은 국민국가 단위로 실시하므로, 기본소득 지지자들이 말하는 보편적 기본소득의 목표는 ‘전 국민 기본소득’이다.

보편적 기본소득까지 가는 길은 산 높고 물 깊고 험준하다. 국민 모두를 포괄하려면 예산이 막대하게 들기 때문이다. 개별적으로 정기적이며 충분한 액수까지 주려면 난관이 더 많다. ‘재난기본소득’이라고도 하는 코로나 초기 전 국민 재난지원금은 조건 없고 보편적이지만 충분하지 않고 일회성 정책이었다. 그럼에도 코로나19로 갑작스런 소득 단절을 겪은 사람들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기본소득의 위계

<자료=서정희·안효상(2021), 기본소득 구성요건의 위계화와 제도에 대한 판별, 비판사회정책 제73호>

위 그림은 기본소득의 구분 체계를 나타낸 표다. 기본소득 아닌 제도는 무조건성으로 구분한다. 공동체가 인정한 활동 참여가 조건인 ‘참여소득’이나, 소득 기준선 이하 사람만 지원하는 ‘부의 소득세’는 기본소득에서 탈락된다. 기본소득에 포함되는 제도 가운데 보편성 범위를 줄이면 ‘범주형 기본소득’이라 한다. 청년기본소득이나 노인기본소득처럼 인구 집단을 한정하되 그 구성원 모두에게 주는 방식이다. 다른 요건을 충족하지만 기초 생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못한 소액 기본소득을 ‘부분 기본소득’이라 부른다.

모든 지향을 만족하는 이상적 기본소득은 ‘완전 기본소득’이다. 기초 생계를 적절히 보장하는 액수를, 다달이 또는 분기별로 평생에 걸쳐, 조건 없이 모든 국민에게 보장하는 것이다.

완전 기본소득에 이르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우리는 드디어 과로의 고통과 실직의 두려움 그리고 비자발적으로 택한 직업이 강요하는 자존감 위축에서 벗어날 수 있다. 완전 기본소득이 보장된 사회에선 누구나 경제적 안전을 약속받고 실질적 자유를 영위하며 하나뿐인 삶을 창발적으로 가꾸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몇 년간 한국에서 특히 정치권에서 기본소득 ‘이름’에 가려 그 ‘향기’가 지닌 가능성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지금이라도 실사구시 태도로, 기본소득의 필요성과 대안적 잠재력에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오준호 기본소득당 공동대표·기본소득정책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