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소외된 자들의 목소리와 감성을 아우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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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여성…소외된 자들의 목소리와 감성을 아우르다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참관기

기사입력2022-10-11 10:47

2022년, 유럽은 유난히 뜨거운 여름을 겪었습니다. 어찌나 뜨거웠던지 프랑스 파리에서는 스스로 점화돼 화재가 발생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죠. 한여름도 8월 중순이 지나면서 조금씩 선선한 공기로 바뀌기 시작하고, 두세 시간을 걸어도 땀에 흠뻑 젖지 않을 만한 날씨에 베네치아에 도착했습니다. 5월부터 시작돼 11월 말까지 열리는 2022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장의 입구에는 여전히 많은 관람객들이 줄을 서고 있었습니다.

1895년 시작된 베니스 비엔날레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2년마다 열리는 국제 미술전시회입니다. 올해는 제59회로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2021년에 열리지 못해 3년 만에 열리게 되었습니다. 홀수년도에 개최됐지만, 이제 짝수년도에 개최되는 대회가 된 셈입니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베네치아에서 당시 이탈리아의 국왕 움베르토 1세와 부인 마르게리타의 결혼 25년을 기념하는 은혼식을 축하하는 행사로 기획되었다고 합니다. 국왕 부부의 개인적인 기념식을 위해 국제 미술전시회를 기획하는 발상을 했다니, 이탈리아인들에게 예술이란 삶에서 즐기는 문화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 줍니다.

국제적인 예술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서 2년마다 열리는 것으로 기획된 베니스 비엔날레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열리는 다양한 아트페어의 유래가 됐습니다. 1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단 두번 중단됐는데, 그 첫 번째가 2차 세계대전 때이며 두 번째가 2020년 코로나 팬데믹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코로나 시대는 질병과의 전쟁과도 같다는 걸 증명한 셈입니다.

미국 작가 시몬 리(Simmone Leigh), ‘주권(부제: 빨래하는 여인)’.

코로나로 힘든 시기를 겪었던 우리들의 일상처럼, 미술계도 힘든 시기를 함께 겪었습니다. 그래서 3년 만에 열리는 올해의 베니스 비엔날레는 마스크를 벗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소망하는 우리들에게 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는 수상 도시로 유명합니다. 매일 수많은 수상 버스와 수상 택시, 그리고 낭만적인 물놀이 배 곤돌라 등 수만척의 배가 다니는 대운하의 풍경은 그들에게는 그저 일상이지만, 여행을 오거나 처음 본 사람들에게는 환상적인 그림처럼 펼쳐지는 섬입니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동시대의 미술을 잘 표현하는 작가들을 비엔날레 주최측에서 초대해 개인전을 여는 아르세날레(Arsenale)와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여하는 국가들이 자국의 예술가들을 선정해 개최하는 국가전이 자르디니(Giardini)에서 함께 열립니다.

수상 버스 바포레토를 타고 자르디니 역에 내려 국가관 전시회장을 시작으로 개인전시가 열리는 아르세날레로 이동하면서 작품 관람을 합니다. 이 밖에도 베네치아의 다양한 장소에서 개인전, 국가전이 열리기 때문에 부지런히 전시회를 관람해도 3일은 꼬박 걸리며 좀더 여유있게 둘러보려면 1주일동안 베네치아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올해 비엔날레 총감독이 된 세실리아 알레마니(Cecilia Alemani)는 ‘꿈의 우유(Milk of Dreams)’라는 부드러운 주제를 걸고 전시회장에 작품을 채웠습니다. 이 부드러운 우유는 초현실주의 여성화가 레오노라 캐링턴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쓴 책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인간과 동물, 식물의 형태가 융합된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초현실주의 이미지로 채워진 동화입니다. 이 책에서 올해의 주제, 즉 인간과 동물, 서로 낯선 존재들의 융합과 합성, 그 융합이 가져오는 낯설음과 환상,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미래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들을 위해 그린 지극히 개인적인 책을 쓴 여성 작가의 창작물에 주목한 것입니다.

올해 평생공로상 부문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독일 작가 카타리나 프리치의 작품 ‘녹색 코끼리’

여성은 예술가로 언제부터 인정받았는가, 그들이 만든 것은 수백년 간 아티스트의 작품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었던 미술의 관점을 성찰하고, 남성 지배의 미술역사에서 소외된 여성의 미술을 주목하자는 취지입니다. 사실 여성의 미술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소외된 자들의 목소리와 감성을 아우르자는 취지로, 소외된 자를 ‘여성’으로 대표하는 미술 이야기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올해 참여한 작가 213명 중 188명이 여성 작가입니다.

국가관 첫 전시장 입구에는 올해 평생공로상 부문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독일 작가 카타리나 프리치의 작품 커다란 ‘녹색 코끼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매우 상징적인데, 코끼리는 원래 늙은 암코끼리가 무리를 이끄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전시회는 중견 여성작가들의 작품이 돋보입니다. ‘녹색 코끼리’는 실제 코끼리의 크기로 제작돼 실제 코끼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폴리에테르로 만든 이 코끼리는 회색이 아닌 녹색으로 칠해져 현실과 닮았으나 현실을 넘어선 초현실세계를 보여주기도 하죠. 그래서 여성 예술가가 이끄는 초현실세계 미술을 상징합니다. 천장에는 1900년대 초 아르누보 양식의 이탈리아 화가 갈릴레오 키니가 그린 미술의 역사가 벽화로 장식돼 있습니다. 고대 로마부터 중세 비잔틴 미술, 고딕미술, 르네상스 미술의 시대가 펼쳐집니다. ‘녹색 코끼리’가 천정화 아래 전시되어 있는 것은 수백년의 미술시대에 여성이 이끄는 미술은 어디에 있었는가를 도발적으로 질문하는 것 같습니다.

올해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재료였습니다. 여성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미술작품의 재료는 실, 천, 흙 등 집에서 사용하거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입니다. 대리석이나 값비싼 안료로 그려지는 유화, 템페라화 등 예술가로 인정받았던 남성이 사용하는 재료보다 훨씬 소박한 재료들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해 온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선정됐기 때문입니다.

국가관의 또다른 대표작가 로제마리 트로켈(Rosemarie Trockel)의 작품 역시, 몬드리안을 연상시키는 강렬한 원색의 추상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모두 뜨개실로 짜여진 것입니다. 남성 작가들에게 오랜 시간 붓과 물감, 캔버스가 미술의 재료로 주어진 동안 여성들은 집에서 실로 천을 짜는 ‘작업’을 해 왔다는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색면 추상화처럼 강렬한 작품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예술가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술가를 누구만 될 수 있다고 규정해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소외되었던 예술의 장막 하나가 걸쳐진 전시장을 둘러 보았습니다.

국가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황금사자상을 받은 미국 작가 시몬 리(Simmone Leigh)와 영국 작가 소니아 보이스(Sonia Boyce)입니다. 두 작가는 흑인여성 작가이며 친구라고 합니다. 여성 그리고 흑인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가장 잘 살린 작품이기에,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더욱 클 것입니다. 시몬 리는 아프리카에서 강제 이주해야 했던 흑인의 삶과 그 안에서도 여성의 삶이 주는 어쩔 수 없는 ‘수동성’과 선택의 자유가 없는 흑인 여성들의 삶에 주목했습니다. ‘주권(부제:빨래하는 하는 여성)’은 자신의 고향이 아닌 타국에서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삶을 살아갑니다. 커다란 욕조 한쪽 끝에서 몸을 구부리고 있는 여성의 모습은 외로움과 고단함, 그녀의 삶에서 빼앗긴 주체성을 느끼게 해 주는 듯 합니다.

이 작품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 공간의 중심에서 나의 삶을 얼마나 주체적으로 이끌고 있는지, 나 역시 그녀처럼 한쪽 끝에서 나의 의지를 상실한 채 주어진 삶의 기획에 수동적인 자세로 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이다 미술역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