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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칼럼

어느 노부부의 산책과 해질녘 바라보는 ‘LOVE’

Life is pain.ting #40. 오후 네 시 

기사입력2021-04-22 11:06

새로 입주한 레지던시가 위치한 인근 지역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일정이 한참 지나서 시작하게 됐다. 한파에 미뤄지던 작업은 날씨가 풀리면서, 지난달부터 타이트한 일정으로 시작하게 됐다. 미군부대 인근에 위치한 오래된 기찻길은 관리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낙후돼 형편없는 모습이었고, 작가들이 투입돼 새롭게 그 골목을 꾸미기로 한 것이다.

 

그 중 내가 맡게 된 기찻길 길목 한 가운데 위치한 아주 오래된 3층짜리 벽돌 건물은 그동안 거주민들이 붙이고 떼기를 반복한 각종 행사 전단지로 인해, 외벽이 오래전 사망한 거북이 등껍질이나 굴껍질처럼 세월의 켜가 단단하게 고정돼 있거나 갈라져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벽돌의 돌출 정도가 각각 달라서 말끔하게 떨어지는 면적이 하나 없는 건물이었기에 시작부터 아이디어 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애초에 제안을 받고 구상했던 구상화 작업은 현장을 본 순간 머리에서 지워버렸고, 두 번째로 가안을 내었던 것도 외벽을 정리하면서 접을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벽돌을 하나하나 살릴 수 있는 방식의 작업을 해야겠다 생각했다. 다민족·인종이 모여 살고 있는 지역의 특성을 살려 모든 인종이 가지고 있는 여러 스킨톤(Skin tone)을 모자이크처럼 섞어 ‘LOVE' 라는 글을 크게 적어 놓는 ‘We are all born in love’라는 타이틀을 붙인 벽화로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보통 벽화라 하면 원색의 강렬한 컬러의 적인 느낌이 강했기에, 전체적으로 톤 다운된 미색이 조화를 이루는 색감으로 마무리하기로 가안을 완성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사진제공=김윤아 작가>

 

세 명의 작가가 투입돼 각각의 파트를 맡아 시작된 기찻길 골목의 작업은 시작부터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작고 낙후된 골목이었지만 메인 도로에 닿기 위해 지름길로 사용되기도 하고, 기찻길을 따라 입점한 몇몇 상점이 있던 터라 그 곳을 찾는 손님들도 더러 지나는 길인 동시에 거주민들은 늦은 오후 반려견과 함께 산보를 위한 길목으로 선택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런 골목에 갑자기 3층 건물까지 쌓아 올린 이동식 비계(아시바)와 각종 페인트 통, 비닐커버링과, 골목에 닿을 듯 스카이 차량마저 들어섰으니 지나는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풍경이긴 했을 터였다.

 

벽을 정리하고, 대략적인 스케치를 끝내고, 조색된 페인트 통을 비계로 올리고, 작업에 들어가면서는 해질녘이 될 때까지 지나는 사람들보다 한 두층 높은 곳에 올라 그들의 목소리나 모습을 틈틈이 지켜 볼 수 있었다. 행인들은 비계 위에서 곡예하듯 붓질하는 모습을 지켜봤을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몇몇은 사진을 찍고 지나기도 했고, 간혹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고, 더러는 들으라는듯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아래에서 볼 때는 어떨지 몰라도 막상 올라가 비계 위에서 일하는 것은 아찔해, 작업에 몰입하기 시작해서 스스로의 고도를 잊기 전까지는 제법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한다. 때문에 중간 중간 내려와 커피나 스낵 따위를 먹으면서 시간을 갖는다.

 

한번은 아래로 내려와 전체적인 진행사항을 점검하고 있는데, 멀리서 노부부가 걸어오고 있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그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2m 정도의 거리를 앞뒤로 두고 걸으며 서로 무심하고 느릿하게 걸어오는 모습으로 보아서는 우리가 흔히 엽서나 감동 영상에서 보는 다정한 노부부의 모습과는 거리가 아주 먼 모습이다.

 

<사진제공=김윤아 작가>
얼핏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간 준비하는 과정동안 매일 목도했던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보폭이 느렸으나 컸고, 빛바랜 블루종과 면바지를 입고 있었으나 말끔하고 단정한 차림이었다. 다섯 걸음 정도의 차이를 두고 뒤에서 작은 걸음으로 따라가는 할머니는 허리와 고개가 아래로 조금 굽어져 있었고, 그 때문에 앞을 보기 위해서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봐야 하는 상태였다. 늘상 그 골목을 걸어왔던 듯 보이던 부부는 갑자기 골목에 들어선 각종 공구들과 비닐커버, 비계를 보고서는 달갑지 않은 듯 보였다.

 

할아버지는 그 앞을 빠르게 지났고, 할머니는 3층 높이의 철근 높이가 위협적으로 보이셨는지 약 2~3m 가량의 폭을 지나며 서너 번 정도 걸음을 멈추고 본인의 안전을 확인하고 지나가셨다. 그 모습을 무심코 지켜보다가 다시 작업을 시작하면서 늘 그랬듯 잊었다. 누군가 그 뒷모습을 자세히 바라보지 않는다면 별다른 색없이 잊혀지기 쉬운 풍경이니 말이다.

 

이틀 뒤에 비가 온다는 소식에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작업을 시작한 나는 그 전날 노인이 지난 그 비슷한 오후 시간 즈음에 그들을 다시 만났다. 그 날이 그들을 본 두 번째 날이다. 저기 멀리 골목 끝에서 들어서는 노인은 여전히 작업 중인 이 골목을 보자마자 일찌감치 한쪽 끝으로 걸음을 옮겨 걷기 시작했고, 역시나 뒤따라 걷던 할머니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앞을 바라보더니 할아버지가 옮긴 쪽으로 몸을 엉거주춤 옮겼다. 그것만 빼면 어제와 별 다른 모습은 없이 흡사 제자리 도장이라도 찍은 듯 꼭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단순하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벽화는 제법 완성된 형태를 띠기 시작했고, 지나는 행인들이 드디어 이 글이 ‘LOVE’라는 걸 알아보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이 러브라고 외치기도 했고, 또 더러는 말을 걸기도 했다. 그날 초저녁 즈음 같이 일하는 분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나는 노부부를 잠깐 생각했다.

 

그 시대의 연애와 사랑, 결혼과, 여자 그리고 남자의 관계, 그들이 바라본 그 때의 세상과 구조, 또 그들이 태어나면서 처해졌을 보편적 환경과 영향.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처음부터 그러려니했음으로 그렇게받아들여졌을 수많은 인식들 따위에 대한 생각을 이어가며 끊임없이 대패 삼겹살을 입에 욱여넣었다.

 

마지막 날이다. 아마도 저마다 구역을 맡은 작가들이 이 골목을 다 마무리 하고 마지막 코팅작업을 하기 전까지는 별다른 일이 없는 한 당분간은 기찻길에 올 일은 없다. 마지막 글자 ‘E’를 마무리하는 오후 즈음 고개를 돌려, 나도 모르게 그들이 걸어오지 않을까 가끔씩 골목 끝을 바라보곤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거의 비슷한 시간에 그들이 골목 어귀를 돌아 작은 점처럼 들어서고 있었다.

 

빛바랜 푸른빛의 블루종은 멀리서 보면 흐린 날의 공기와 섞여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흐리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가까이 오기 전 나는 붓통을 내려놓고 아래로 내려가 골목 벽에 쌓아둔 빈 페인트 통 위에 앉아, 오전에 사다 놓은 얼음이 녹아 사라지기 직전의 닝닝한 커피를 입에 물었다. 어느새 다가온 할아버지는 여전히 앞장서 나타나 내 앞을 지났고, 뒤이어 할머니의 주춤한 걸음이 눈앞에 지나기 시작했을 때다.

 

느닷 할아버지가 돌아와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거슬리는 아시바와 좁은 폭을 사이에 두고 페인트로 엉망으로 얼룩져 앉아 있는 내 사이에서 주춤하는 할머니가 신경쓰였던 걸까.

 

할머니는 익숙하게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빠르게 좁은 폭을 지났고, 그 사이를 지나자 그는 할머니의 손을 놓고 다시 앞장섰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정면을 한번 바라보고 뒤이어 다시 걸어가는데, 멀어지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니 할머니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 때마다 기가 막히게도 뒤돌아보지도 않고도 할아버지는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게 아닌가.

 

해질녘 바라보는 미색의 ‘LOVE’ 는 왜 이렇게 빛바랜 블루종 점퍼와 닮아 보이던지. (중기이코노미 객원=김윤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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