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낡은 것과 파묻힌 것 사이에 숨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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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진실은 낡은 것과 파묻힌 것 사이에 숨어 있기에 낡은 진실을 찾아서…박선호 작가

기사입력2023-12-07 09:52

황재민 미술평론가 (inthebox28@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목소리가 들린다. 오래된 테이프 레코더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다. 박선호의 ‘AB 사이드(2021)’는 양면으로 이루어진 테이프의 특성을 활용한 영상작업이다. 테이프의 A면에서는 텔레비전 광고 성우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린다. B면에서는 신문기사의 건조한 문장을 읽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다. 영상에서는 손이 등장하는데, 그 손은 레코더의 되감기 버튼을 누르며 A면과 B면의 목소리를 교차시키고 있다.

‘AB 사이드’, 싱글 채널 비디오, UHD, 컬러, 사운드, 8분5초, 2021. <이미지=작가 제공>

목소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A면의 소리는 1985년부터 금성기업이 제작한 광고의 일부다. ‘테크노피아’라는 이름이 붙은 금성의 광고 캠페인은 기술이 만들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미래를 힘주어 증언하고 있었다. “인간의 꿈”, “첨단기술이 펼쳐가는 낙원, 테크노피아”. 하지만 잠시 후, 하얀 손이 나타나 레코더의 버튼을 누르면, 희망찬 목소리가 뚝 끊어진 뒤 B면의 소리가 나타난다. “이렇게 적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 프로그래머의 위치는 (…) 결혼, 퇴직 재고 등 (…) 근로조건 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테크노피아’가 낙원을 약속했던 바로 그 시기, 여성이라는 이유로 프로그래머 일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카세트테이프는 CD나 디지털 음원과는 달리 양면으로 이루어진 저장매체다. A면과 B면을 동시에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면을 다 듣고 나면 반드시 꺼내어 뒤집어야 하는 불편함. 오늘날 카세트테이프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 이유는 이런 불편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AB 사이드’는 노후하고 불편한 테이프의 특성을 이용한다. 작가는 테이프 레코더를 조작하며 공존할 수 없는 두 개의 목소리를 하나로 이어 붙인다. 첨단기술이 속삭이는 낙관적인 미래와 경력 단절된 여성이라는 개인의 현실이 한국의 1980년대를 배경으로 두고 겹쳐진다. 여기서 카세트테이프를 유행에 뒤처진 고물로 만든 불편함은 역사 속에 숨은 양면적 이야기를 드러나게 하는 장치가 된다.

‘고고학 테이블’, 아스텔과 아크릴로 제작한 다섯 개의 판, OHP 필름에 출력, 싱글 채널 비디오 ‘AB사이드(2021)’마운트, 1000×450×890mm, 2022. <사진=전명은, 이미지=작가 제공, ‘Combination!:컬렉션과 아카이브’ 설치 전경>

미술사와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인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쇠퇴한 테크놀로지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았다. 어떠한 기술이 유행의 한복판에 있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유행에 뒤떨어지는 순간 다시금 보이게 된다. 카세트테이프의 양면 재생이 평범한 재생 기능에 불과했다가 역사의 양면적 이야기를 보여주는 장치가 되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프로그래머’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연히 남성의 생김새를 한 누군가를 떠올린다. 그러나 지난 2차 대전 시기에 프로그래밍은 단순노동 취급을 받았으며, 대부분의 프로그래머는 여성이었다. 이와 같은 과거를 염두에 두었을 때, 여성이기 때문에 프로그래머 경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의 이야기는 역설적이다. 우리가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역사에는 언제나 은폐된 진실이 있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마치 구원과 같은 낡은 시간이 필요하다.

작년, 박선호는 ‘고고학 테이블(2022)’이라는 제목의 작업을 제작했다. 작가는 여러 겹의 층이 난 테이블을 만들고, 층 사이사이 리서치한 자료를 배치했다. ‘AB 사이드’ 또한 여기 포함되었다. 관객은 ‘고고학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여러 자료를 살펴보고, 테이프 레코더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집중해야 했다. 이때 관람 행위는 깊게 묻혀 있는 것들을 신중하게 파내야 한다는 점에서 마치 고고학과 같았다.

어쩌면 누군가는 의아하게 느낄 수도 있다. 세상에 더 보여줘야 할 중요한 이야기를 힘들여 파묻는 작가의 선택이 말이다. 하지만 낡아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듯, 묻혀야만 비로소 찾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을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낡은 것과 파묻힌 것 사이에 숨어 있기에 찾아내기 힘들다. 박선호는 이 사실을 알고 있기에 쉬운 형태로는 말하지 않는다. (중기이코노미 객원=황재민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