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공간에 작품 없으면 뭘 감상하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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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지 ㅣ 예술을 읽다 전시공간에 작품 없으면 뭘 감상하라는 것일까 텅 빈 전시공간은 결코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텅 빔을 채우는 것들

기사입력2024-02-10 00:00

안진국 객원 기자 (critic.levahn@gmail.com) ㅣ다른기사보기

안진국 미술비평가(‘불타는 유토피아’, ‘비평의 조건’ 저자)

‘여백의 미’라는 말이 있다. 비워놓음으로써 아름답다는 의미로, 한국화의 표현과 감상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용어다. 이제는 널리 사용되면서 일상에서도 쓰일 정도다. 이 말은 너무 과한 것보다 없는 게 좋다는 의미와도 통한다. 이와 유사해 보이는 의미로 ‘미니멀리즘’을 떠올릴 수 있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함을 아름답게 보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 둘은 질적으로 다르다. ‘없다’와 ‘단순하다’가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백의 미’에서 ‘여백’은 단순히 없는 게 아니라, 표현의 한 요소로 화면에 자리 잡는다. 쉽게 말해 ‘없음’을 화면에 채우는 것이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은 일종의 단순화라고 봐야 한다. 즉 없음으로 공간을 채운다기보다는 없앰 그 자체에 무게 중심이 있다.

그렇다면 ‘없음’은 무엇이고, ‘없음으로 채운다’의 실제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예술은 ‘없음’의 의미와 그 실제적인 의미를 꾸준히 탐구해 왔다. 예술에서 ‘없음’은 절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침묵이 아닌 소리의 악곡=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아 4분 33초 동안 한 번도 건반을 누르지 않다가 연주를 마치고 나가는 악곡이 있다. ‘4분 33초’(1952년)라는 곡이다. 너무 황당한 이 악곡에 관해 아마도 한 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악곡은 우연성 음악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미국 작곡가 존 케이지(John Cage)의 가장 유명한 곡이며,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곡이다.

존 케이지, ‘4분 33초’, 음악 지시문 및 악보. <출처=Henmar Press Inc.>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는 이 악곡은 악보에 해당하는 음악 지시문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세 악장이라는 음악적 구성까지 갖췄다. 이 음악 지시문에는 ‘TACET(타셋)’이라는 비교적 긴 휴식을 뜻하는 음악용어가 적혀 있다.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이 악곡이 어떻게 세 악장으로 구성될 수 있는지 의아할 것이다. 1952년 8월29일 이 곡을 초연할 때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David Tudor)는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지 않았지만, 그 대신 했던 행동이 있다. 바로 악장의 시작과 끝을 알리기 위해 피아노 건반 뚜껑을 올렸다가 내리는 행동이다. 이를 통해 세 악장을 구분했다.

침묵의 악곡으로 유명한 이 곡은 많은 사람이 알다시피 피아노 소리를 멈춤으로써 피아노 소리가 채워야 할 공간을 콘서트홀 내부의 소리로 채웠다. 마루가 삐걱대는 소리, 관객들의 기침 소리, 옷깃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관객들 간의 작은 속삭임, 콘서트홀을 울리는 작은 소리의 반향…. 침묵의 악곡으로 알려진 이 곡은 소리가 없기는커녕 사실상 소리로 가득하다. 이 곡은 연주소리를 대신해 일상의 소리로 채운 음악인 것이다.

‘4분 33초’는 ‘없음’이 존재할 수 없음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이 곡은 케이지의 무반향실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무반향실은 반향성을 제거해서 어떤 소리도 있을 수 없게 설계된 공간이다. 우리는 공간의 크기를 내부의 울림을 통해 가늠하게 되는데, 불 꺼진 밀폐된 공간과 방음 처리된 벽은 일반적인 청각 환경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공간감을 잃게 한다. 이 텅 빈 공간에서 소리는 사라진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

케이지는 ‘4분 33초’를 초연하기 일 년 전인 1952년 하버드대학 무반향실을 방문해 그 공간을 경험했다. 이를 통해 그는 그 공간이 놀랍게도 소리의 없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케이지는 무반향실에서 고음과 저음을 들었다. 이 소리가 무엇인지 묻는 그에게 무반향실 엔지니어는 “고음은 당신의 신경계가 작동하는 소리고, 저음은 당신의 혈액이 순환하는 소리”라고 말해줬다. 아무 소리도 없을 것 같은 무반향실에 들어서면 자신의 신체가 내는 심장박동 같은 친숙한 소리뿐만 아니라, 몸의 신경계가 내는 낯선 소리도 듣게 되는 것이다. 케이지는 무반향실의 경험에서 소리 없음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았다. 인간이 숨 쉬고 있는 한 완전한 정적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텅 빔, 한 회고전(Voids, A Retrospective)’ 전시 장면. <출처=서적 Voids A Retrospective Centre Pompidou Kunsthalle Bern Centre Pompidou-Metz>

◇텅 빔으로 채운 전시=‘4분 33초’ 같은 연주 없는 악곡을 전시로 빗대어 보면, 작품 없는 전시를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전시는 여러 차례 있었다. 가장 잘 알려진 전시로 1958년에 연 이브 클랭(Yves Klein)의 ‘텅 빔(The Void)’과 1961년의 ‘텅 빈 방(Salle du Vide)’이 있다. 1970년에 개최된 로버트 어원(Robert Irwin)의 ‘실험 상황(Experimental Situation)’도 텅 빈 갤러리가 전부였고, 아홉 명의 예술가가 참여한 2009년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대형 전시 ‘텅 빔, 한 회고전(Voids, A Retrospective)’도 주제와 내용이 텅 빈 전시였다. 그 외에 전시공간을 비워놓고 문을 닫아 못 들어가게 하거나, 작품 없는 전시를 주제로 한 전시가 자주 있었다. 그런데 전시공간에 작품이 없으면 뭘 감상하라는 것일까?

전시장을 상상해 보라. 우리가 세심하게 살펴보지 않아서 그렇지, 전시공간은 작품 외에도 많은 것이 존재한다. 흰 벽과 천장, 바닥, 출입문뿐만 아니라, 관람객이 소곤대는 대화 소리, 마른기침 소리, 전시장 안에서 들리는 발소리, 도슨트나 관리자가 움직이는 소리, 에어컨 소리, 교통 소음, 작품을 비추는 조명에서 나는 소리 등 여러 소리가 존재한다. 작품에 집중하는 사이 우리는 이런 다른 것들을 쉽게 놓친다. 하지만 전시공간에서 작품을 없앴을 때 우리는 작품 외에 존재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게다가 텅 빈 공간은 소리의 반향으로 그 소리를 더 크게 만든다. 텅 빈 전시공간은 결코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작품 대신 소리로 채워진 공간이다.

그런데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했던 익숙한 전시공간의 소리가 낯설게 된다면 어떨까? 전시공간의 실체와 역할을 꾸준히 탐구했던 마이클 애셔(Michael Asher)는 단순한 텅 빈 전시를 넘어서 낯선 텅 빔으로 전시를 보여줬다.

마이클 애셔, ‘무제’, 1969, MoMA 내부공간 설치. <출처=MoMA>

전시공간의 벽과 입구를 제거하거나 전시공간의 흰 벽을 긁어서 내부구조를 드러내는 등 전시공간 그 자체를 작품으로 제시했던 그는 1969년 11월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현대미술관(MCASD, 라호야 소재) 내부에 방 하나를 만들었다. 제목 없는 이 설치작업의 바닥에는 두꺼운 흰색 장모 카펫이 깔려 있었다. 천장은 원래 방음 처리가 되어 있어 천장과 바닥은 소리를 흡수했다. 게다가 벽 뒤에서 발진기와 스피커를 사용해서 85헤르츠의 낮은 사인파를 만들었다. 소리를 흡수하는 천장과 바닥과 달리 벽면에는 특별한 처리를 하지 않아 벽 뒤에서 지속해서 나는 가청 영역의 경계에 있는 소리는 수평으로 반향했다. 이 때문에 이 방에 들어선 관람객은 텅 빈 공간에서 예상했던 반향 소리와 다른 소리를 듣게 된다.

애셔는 같은 해 12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열린 단체전 ‘공간(spaces)’에서도 텅 빈 공간을 만들었는데, 이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리를 경험하게 했다. 천장 높이를 기존 4.26미터에서 2.4미터로 낮추고 천장과 바닥에 방음을 위한 이중 패널을 설치했으며, 공간을 위해 새로 세운 벽면 안쪽에는 유리섬유로 된 방음 소재를 채웠다. 벽의 지지대는 고무쐐기를 사용해 진동을 흡수하게 했다. 그는 이 공간을 마치 무반향실처럼 소리를 흡수하게 해 일상적인 텅 빈 공간에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경험을 하게 했다. 샌디에이고 현대미술관에서 만든 텅 빈 공간이 수평으로 반사되는 색다른 소리의 반향을 느끼게 했다면, 뉴욕 현대미술관에서는 반향을 없애는 데 집중했다고 볼 수 있다.

미술에서 ‘시각’이 중요하고, 음악에서 ‘연주’와 ‘가창’이 중요하다. 하지만 ‘시각’에만 집중했을 때, 미술은 눈의 감각에 국한될 수밖에 없고, ‘연주’와 ‘가창’에만 집중했을 때, 음악은 조화로운 인위적인 소리를 넘어설 수 없다. ‘시각’, 그리고 ‘연주’와 ‘가창’을 없앴을 때, 그 빈자리에 언제나 존재했던,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드러난다. 텅 빔은 텅 빔이 아니며, 없음은 없음이 아니다. (중기이코노미 객원=안진국 미술비평가)